오래전 들었던 말이 있다. 지금은 문학을 전공하고 있지만, 그 전에 문학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을 공부하던 때였다. 그러다 보니 학교를 다니는 이유는 오로지 학점을 채우기 위함이었고 수업에 멍하니 앉아라도 있으면 다행이었다.
어느 날 한 수업 전에, 한 동기가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귀에 들어왔다. 안면이 있는 사이이긴 했지만 따로 사적으로 말을 한 적은 없는 친구였다. 그런데 그 친구가 앞으로 읽을 계획이라며 말하는 책이 너무 별로라 참을 수 없어진 나는 뜬금없이 그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 작가 책이 왜 별로였는지, 왜 추천하지 않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그 대화를 계기로 다른 친구들과 독서 소모임이 만들어졌다.
처음 모임이 있던 날 주섬주섬 토론 대상인 책을 가방에서 꺼내고 있는데 그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모리야, 그때 네가 갑자기 책 얘기할 때 난 네가 그런 눈빛 하는 걸 처음 봤어.
비슷한 말을 다른 사람에게 들었던 적이 또 있다. 흥미와는 전혀 관계가 없던 일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쉬는 시간에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내가 좋아하는 커피가 대화 주제로 나왔다. 원두를 추천해달란 말에 신나는 감정을 최대한 절제한 뒤, 선호하는 커피에 대해 진지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지나가던 선배가 툭 말했다. 모리 씨 그런 눈빛 처음 봐요. 당시에 나는 그 말이 충격적이어서 자연스럽게 반응하지도 못한 채 어색하게 웃었다. 열정적으로 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지금까지 아주 성공적이라고 자부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평소에 내가 썩은 동태 눈깔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철렁하며 깨달았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걸. 그날 퇴근하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비단 눈빛만이 아니라 눈빛을 포함한 전반적인 분위기를 인식한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 것일 테지만, 눈빛은 통제하기 힘들다는 생각도 들었다.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앞으로 더 많은 사회생활을 하며 생계가 위협당하는 상황에 놓이면 이 역시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아직 사회의 쓴맛을 모르기에 사회생활에 서툰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좋아하는 것에 열중할 때 나오는 자연스러운 눈빛을 따라갈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이 반짝반짝 자연스럽게 눈을 빛내는 순간은 어쩐지 너무나 소중하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살다 보면 눈빛을 속여야 하거나, 혹은 나도 모르게 빛 자체를 잃어버리기도 쉽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뿐만 아니라 사람이 사랑스러운 존재를 보거나 기쁨으로 일렁일 때 가지는 보편적인 눈빛이 좋다. 고양이를 쓰다듬거나 아기를 바라볼 때, 깜짝 선물을 받았을 때, 근사한 풍경을 응시할 때, 혹은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손을 뻗을 때의 눈빛들. 자신도 모르게 눈을 빛내는 그런 순간들을 목격하는 게 참 좋다.
삶에서 눈이 반짝이는 것만 같은 순간을 만날 때마다 떠오르는 문장이 있다. 최은영의 소설 「그 여름」에서 제일 좋아하는 문장으로 아래와 같다.
“(중략) 이경은 자신이 뼈와 살과 피부를 가진 존재라는 것에 감사했고, 언젠가 죽을 때가 되면 기억에 남는 건 이런 일들밖에 없으리라고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