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 하나하나에 목숨 걸고 쓰는 낭만파는 아닙니다. 하지만 편지에는 꽤나 진심입니다. 이 허접한 발신인에게도 이상이 있거든요. 이 오랜 이상은 바로 이상입니다. 말장난 같은 게 아니라, 정말로 ‘이상’입니다.
작가 ‘이상’이, 애인과 함께 몰래 만주로 떠나버린 여동생 ‘옥희’에게 쓴 편지를 압니까? 어렵고 난해한 문학으로만 그를 알았던 나에게 이 편지는 그야말로 반전이었습니다. 편지의 초중반, 여동생이 애인과 몰래 떠나버린 그 현장에 대한 묘사와 그에 대한 서운함과 어찌나 생생한지! 나까지 있지도 않은 여동생과 헤어진 것 같습니다. 그는 철없던 동생이 자기도 가지 못한 먼 세계에 있는 감회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 (…) 삼 남매의 막둥이로 내가 너무 조숙(早熟)인 데 비해서 너는 응석으로 자라느라고 말하자면 ‘만숙(晩熟)’이었다. 학교 시대에 인천이나 개성을 선생님께 이끌려가 본 이외에 너는 집 밖으로 십 리를 모른다. 그런 네가 지금 국경을 넘어서 가 있구나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난다.
어린애로만 생각하던 네가 어느 틈에 그런 엄청난 어른이 되었누. 」
그 뒤에는 부모님이나 사회 풍조와 다르게 열린 마음으로 동생의 행동의 이유를 헤아려보기도 합니다. 세상살이에 대한 따끔한 당부도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부분이 가장 유명합니다. 바로 이 부분입니다. 제가 가장 사랑하고, 압도되었던 부분입니다.
「 (…) 이해 없는 세상에서 나만은 언제나 네 편인 것을 잊지 마라. 세상은 넓다. 너를 놀라게 할 일도 많겠꺼니와 또 배울 것도 많으리라.
축복한다.
내가 화가를 꿈꾸던 시절 하루 5전 받고 모델 노릇 하여준 옥희, 방탕 불효한 이 큰오빠의 단 한 명밖에 없는 이해자인 옥희, 어느덧 어른이 되어서 그 애인과 함께 만 리 이역 사람이 된 옥희, 네 장래를 축복한다.
이틀이나 걸려서 이 글을 썼다. 두서를 잡기 어려울 줄 알지만, 너 같은 동생을 가진 세상의 여러 오빠에게도 이 글을 읽히고 싶은 마음에 감히 발표한다. 내 충정만을 사다오.
-닷샛날 아침, 너를 사랑하는 큰오빠 쓴다 」
그의 문장은 참 담백합니다. 활자만 읽으면 근대의 ‘모던 보이’처럼 쿨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동생을 향한 따스함의 숨결이 백 년이 지나서도 또렷이 느껴집니다.
특히 축복은 이 편지를 가장 아름답게 만드는 부분입니다. “축복한다.”라는 네 글자를 보기만 해도 가슴이 찬란히 먹먹해집니다. 치기와 충동, 어리석음으로 비난했을 다른 이들과 달리 그는 외칩니다. 세상은 넓고 놀라운 일들이 많아. 그 안에서 네가 행복하기를 축복한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이 축복이 아닐까요. 수신인 옥희 씨가 지면에 소개된 이 편지를 읽고 어떤 기분이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불멸의 문학이 된 이 편지의 미래의 한 수신인으로서 나는 그 축복의 기운을 받습니다.
이상의 편지는 두고두고 나의 이상이 되었습니다. 누군가와 작별할 때 꼭 저런 편지를 줄 수 있다면. “이해 없는 세상에서 나만은 언제나 네 편인 것을 잊지 마라.” 이 말에 담긴 굳건함으로 그의 편이 되어주어 이 마음을 문장으로 맹세하고 편지로 써주기를 그려왔는데… 그에게 그러한 멋진 편지를 줄 기회를 살리지 못해서 버스에서 내내 기운이 빠지고 만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