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뒤 나는 대만으로 여행을 떠났다. 열흘간의 여행 마지막 날, 비행기가 인천에 무사히 착륙했다. 놀랍도록 빠른 비행기는 서해를 지나 땅바닥에 닿고 쭉쭉 활주로를 달리다가 이윽고 멈췄다. 푸쉬- 멀리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의 나는 ‘0’이구나.
문득 확률은 인간에게 별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0.0000001%의 확률로 일어날 법한 일은, 일어난 사람의 인생에서는 또렷하게 ‘1’이 된다. 일어나지 않은 인생에게는 ‘0’이고. 수많은 0과 1을 오랜 기간에 걸쳐 나열해서 수치화한 게 확률일 뿐이다.
0과 1의 차이는 1이다.
1은, 전부.
사실상 0과 1은 서로를 영영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도 생각했다.
*
이번 열흘간의 여행에는 다행히 별‘일’이 없었다.
음식을 먹고 체한 경우는 없었다. 다리가 조금 아프긴 했지만 주저앉아버리는 경우는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었지만 일어나지 못한 경우는 없었다. 친구들이 사고를 겪은 경우는 없었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경우도 없었다. 우리 중에 죽은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0들이다.
우리의 주변도 온통 0이었다. 여행 바깥의 사람들에게도 별‘일’이 없었다. 갑자기 슬픈 소식이 한국에서 들려오지 않았다. 할머니의 병이 재발해 병원에 간 경우도 없었다. 가족 중에 누가 문에 발이 끼어 발톱이 빠졌다는 경우도 없었다. 내가 없어서 발생한 문제도 없었다. 누가 죽지도 않았다.
나라는 0을 수많은 0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래서 이 여행은 순탄히, 잘 굴러갔다. 거대한 바다를 무사히 넘었고 일정대로 데굴데굴 잘 굴러갔다. 기막히게 1들을 피했다. 딱히 의도한 건 아니었다. 특별히 위험한 짓을 구태여 하지는 않으니 의도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닥쳐오는 게 1이기 때문에 모든 건 우연이다. 1의 우연들은 나와 나의 세계를 우연히 비껴나가고, 침범당하지 않은 0들이 데구루루 하루 위를 굴러가고 있다.
나의 여행은 누군가에겐 잘 굴러가지 않는, 어쩌면 구르기가 멈춘 날들일 수도 있다. 추상적으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아마 1의 밤이 숨 막히게 닥쳐오기 전까지 제대로 알지는 못할 것이다. 이러한 무지(無知)의 0에 어리석음을 느끼면서도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1에 반응하며 슬퍼하며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 무지의 냉정이, 0의 여행을 온전히 즐기게 해주니까.
모든 게 잘 굴러가 무사히 돌아와야만, 여행은 좋게 기억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입국 전, 대만의 공항에서 기념품을 사기 위해 오랫동안 떠돌았다.
이 여행객의 짐은 나이를 먹을수록, 입국이 가까워질수록 무거워진다.
원래는 기념품을 사지 않았다. 기념을 위한 물품 같은 건 필요 없어! 여행의 기억만 있으면 되지. 그 추억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여행은 여행객의 것만이 아니다. 나의 여행이 여행일 수 있도록 0이었던 모든 이들과 거대한 행운을 기념하는 게 도리다.
유명한 대만 과자라는 걸 8박스나 사왔다. 동행이었던 친구- 또 다른 0에게 과자를 하나 건넸다. 집에 도착해서는 가족- 또 다른 0에게 선물을 전했다. 다음 날에는 친척- 또 다른 0에게 선물을 택배로 보냈다. 주말에는 알바하는 곳- 또 다른 0에게 과자를 권해주었다.
“파인애플 잼이 들어있는 대만의 유명한 과자에요.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해요.”
선물에 대해 설명하면서 문득 이 과자는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까르르 구르며 가루를 날린다. 동시에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들의 기억이 흐려짐에 속으론, 조금 울적해있다.
나이에 1이 더해지고, 인생에서 작고 큰 일이 더해지면서 우리는 점점 최후의 1에 가까워짐에 느낀다. 0에서 1은 겨우 1의 차이일 뿐이다. 전등의 on/off와 종이의 앞면과 뒷면처럼. on이 자신이 사라지는 순간에 나타나는 off의 낌새를 알듯이, 앞면이 뒷면이 존재함을 느끼듯이.
1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없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완벽하게 0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만 내가 계속 0일 수 있단 말인가에 답을 내릴 수 없다. 집에만 있어볼까. 언제 집에 불이 날지 모르는 걸. 화장실 바닥에 심하게 미끄러져 넘어지면 1이 되어버리는 게 인생인걸. 갑자기 누가 초인종을 누르지도 않고 들어올지 모르는걸.
하지만 불안하지는 않다. 굴러가는 공이 멈출 때를 걱정해서 제대로 구르지 못하면 무척 슬픈 건 확실하니까. 공은 그저 구르면 된다. 구르면서 온몸으로 기뻐하면 된다. 구르는 건 숨 가쁘게 즐거운 일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