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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생각해도 난 금사빠가 맞는 것 같다. 사랑을 단계적으로 시작하기보다는 어느 날 갑자기 사고처럼 당하는 일이 많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에게 푹 빠져 혼자만의 상상 속에서 그 사람과 실버타운까지 들어간다. 그에 대해서 뭘 아는데? 스스로도 웃기지만 사실 내게는 정보의 부재가 오히려 감정의 증폭제가 된다.

  금사빠 기질이 사람에만 한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 먹어본 요리, 모르는 가수의 노래, 작가도 아닌 누군가의 글이나 낙서, 그리고 어디선가 발견한 낯선 사물들, 동물들, 식물들. 세상에는 나를 빠르게 끌어당기는 것들이 너무 많다. 공간도 빼놓을 수 없다.

  내가 간 지역의 이름도 알지 못하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장소와 사랑에 빠졌다. 걸핏하면 마음을 주고 앞으로 자주 오겠다는 약속을 한다. 계기 같은 건 별로 없다. 우연히 간 곳에서 우연히 기분이 좋으면 운명이 되고, 운명이라는 이름은 나를 고민도 없이 사랑에 빠뜨린다.

  예를 들면 일산. 우리 집에서 왕복 5시간이 걸리는 아주 먼 곳이다. 중학생 때 처음 mbc 음악방송을 보겠다고 일산을 갔다. 호수 공원이라는 커다란 자연 명물과 라페스타라는 지역 핫플이 붙어있는 완벽하게 이상적인 구조가 충격적으로 마음에 들어 사랑에 빠졌다.

  월계역에서 이어지는 한내교. 알바하고 돌아오는 길 그날따라 환승이 귀찮아 평소와는 다른 역에서 내렸다. 처음 와보는 월계역에서 출구를 찾아 헤매다가 발견한 한내교는 전등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 예쁜 광경을 우연찮게, 그것도 다른 누구와 함께가 아닌 나 혼자 봤다는 게 비밀스럽고 특별했다. 그렇게 한내교와 사랑에 빠졌다.

  안국역. 옛 친구가 살던 곳이다. 저녁이 되면 낮고 작은 가게들에서 나오는 불빛과 가로등으로 전통 한옥집들과 벽돌담이 따뜻한 주황색을 띤다. 그 당시 나는 이 친구 덕분에 이런 예쁜 동네를 알게 되었다는 게 너무 행복했고, 잊지 못할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안국과 사랑에 빠졌다.

  늘어놓자면 끝도 없으니 이쯤 줄인다. 내가 빠진 공간들은 기억 속 한 장면씩을 단단히 차지하고 있다. 한번 본 장소인데도 그 공간 특유의 색, 온도, 냄새가 느껴지는 듯하다. 찰나에 찾아오는 사랑은 이만큼 강렬하다. 그리고 확실하다. 땅을 안 보고 걷다가 깊은 웅덩이에 푹 빠진 거 같다. 금사빠 기질이 위험하다고들 하는 이유일 것이다. 언제 어디서 웅덩이에 빠질지 모르는 채 길을 걷는다는 것. 그리고 그 웅덩이에 빠질 때마다 물을 흠뻑 뒤집어쓴다는 것.

  웅덩이 같은 사랑보다 더 위험한 게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말은 꽤 오래전부터 알았는데도 말이다. 내게도 가랑비, 아니 이슬비, 아니면 거의 습기에 가까울 만큼 미세한 물이 나를 적신 적 있었다.

  1년 동안 다니던 학교를 자퇴했다. 그 공간이 나도 모르는 새에 스며들어 있었다는 건 자퇴서를 내고 오는 길에 깨달았다. 그때의 나는 그 학교를 잠깐 다니다 떠날 공간이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 그래서인지 구태여 특별한 추억을 쌓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실제로도 고등학생 시절의 대학 로망 같은 특별한 일이 매일 벌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 학교를 드나드는 동안 내게는 시답지 않은 기억들만이 쌓였다. 두 건물 정도를 오고 가며 수업을 들었고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고 몇 안 되는 학교 앞 식당에서 비슷한 음식들을 질리도록 먹었다. 첫 만남만으로 사랑에 빠져버린 공간들과 달리 나는 학교를 다니면서 이곳이 좋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반수 끝에 대학 합격 소식을 들은 다음날, 나는 바로 학교에 자퇴서를 접수하러 갔다. 깜짝 자퇴 소식을 들은 학과장님만큼 나도 얼떨떨했다. 반수하는 사람 치고는 학교를 떠나겠다는 결심이 전혀 안 되어 있기도 했다. 조금은 외로운 기분으로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데 그 순간에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한 번도 복도의 불이 켜진 걸 본 적이 없는 어두컴컴하고 습한 단과대 건물이나, 매점에서 사 먹던 한강 라면이나, 내가 늘 첫 승객이던 버스, 고동색 벽돌로 지은 오래된 학교 건물, 그 사이사이에 있던 고양이들. 역시나 시답지 않은 장면들이었지만 그것들이 후두둑 스쳐감과 동시에 정체 모를 눈물이 나왔다. 스며듦에 대한 자각은 그때 찾아왔다.

  마음을 줄 작정이 전혀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스며든 감정은 웅덩이보다 깊고 위험하다. 떠나는 길에 눈물이 날 정도인 것이다. 작정하고 사랑에 빠진 일산, 한내교, 안국 같은 곳은 떠난대도 눈물은 나오지 않을 것 같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 너무 일상적이라 아무 감흥도 없는 공간들은 꽤나 걱정이 된다. 20년간 살아온 우리 동네, 우리 집, 내 방, 그리고 전적대보다 훨씬 오래 다니고 있는 지금의 학교. 지금은 이 공간을 사랑한다는 자각이 없을지 몰라도 언젠가 헤어질 때가 되면 어떨까. 이별 준비하는 셈 치고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면 우리 아파트의 촌스러운 페인팅이 생각나서 울 것 같다. 우리 동에서 정문까지 가기 귀찮아서 주민 모두가 담을 넘어 다니던 수고로움이 생각나서 울 것 같다. 1층이라 도로 쪽에서는 널어둔 빨래가 다 보이는 우리 집 베란다가 나를 울릴 것이고, 방 꾸미기에 최악인 내 방 연두색 벽지가 나를 울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