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읽은 김동식 작가의 <회색 인간>에 나오는 부분이다. 책은 지저(지하) 세계 인간들이 문화를 하등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는 지상 인간들을 땅속으로 끌어들였고, 이들이 지상 인간들에게 지저 세계의 땅을 파는 노동을 시킴으로써 지상 인간들이 점점 생기를 잃어 가는 내용. 비현실적이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에 대입해서 읽어 보아도 그리 어색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에는 벽에 그림을 그리며 노래를 부르는 여자가 등장한다. 처음에는 모두가 노동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지저에서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않은 채 노래나 부르는 여자를 미친 사람 취급 했다. 모두가 욕하고, 돌을 던지면서까지 이 여자를 말리려 했지만 여자는 말을 듣지 않았다.
여자는 언제나 돌을 맞아도 꿋꿋이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렸다. 알고 보니 이 여자의 직업은 화가였고, 그녀는 이곳을 탈출한다면 지저 세계에서 인간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전부 그려 세상에 알릴 수 있다고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말했다.
이후로 사람들은 그 여자를 욕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언젠가 한 사람이라도 지상으로 올라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알릴 수 있기를 바라며 희망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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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 눈과 인간의 성질이 비슷하다고 했던가? 지금부터는 그 말을 잠시 넣어 두고 싶다. 바닥에 떨어진 눈은 곧 사람들과 자동차 바퀴에 밟혀 검어지겠지만, 인간 세상에 떨어진 나는 밟힌 눈처럼 어두운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바닥에 납작 깔려 버린 까만 눈, 삶을 포기한 듯이 녹아내리는 그런 까만 눈처럼 살고 싶은 마음은 절대 없다!
그래서일까. 소설을 다 읽은 후, 검고 질퍽거리는 사람이 될 바에는 차라리 그보다 덜 오염된 회색 인간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사실 그렇지 않나. 땅굴의 돌가루로 둘러싸인 회색 인간과 사회생활의 먼지로 둘러싸인 나, 당장 지금 비교해 보아도 둘은 별반 다를 게 없다.
현실에서까지 회색 인간이 될 운명이라면, 그렇다면… 이제는 지상 세계의 회색 인간도 소설 속 지저 세계의 회색 인간들처럼 생각의 전환을 시도해 보아야 할 때였다.
너무 하얗기만 하면 때가 묻을까 봐 겁나서 남들이 뛰어드는 눈밭에 함께 뛰어들지도 못할 것 같고, 그렇다고 너무 까매지면 본질을 잃기 쉽다. 당장 바닥에서 검게 물든 눈만 봐도 이게 진흙인지 눈인지도 모를 만큼 못나게 녹아 있는데. 이대로 회색 인간처럼 사는 것... 어쩌면 나쁘지 않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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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이라면 세상을 조금이라도 경험해 보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세상을 경험하며 지금까지 열심히 달려왔을 여러분이 혹시 이 글을 읽으며 자신도 탁한 회색 인간이 되어 버린 것 같아 왠지 모를 씁쓸함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사실이 조금은 위안으로 다가가길 바란다.
모든 일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비록 우리가 세상 맑고 순수한 아기로 태어났지만 지금은 세상의 온갖 풍파를 맞아 온 덕에 먼지가 가득 묻은 꼬질한 회색 인간이 되었대도, 그렇대도 뭐 어떤가.
적어도 회색 인간은 남들과 함께 눈밭에 뛰어들 수 있다. 남의 눈을 신경 쓰다가도, ‘지금도 충분히 때 묻은 몸인데 여기서 더 묻혀 봤자지. 뭐 어때!’라는 마음가짐으로 얼마든지 뛰어들 수 있지 않나. 회색 인간은 그 몸이 어둡고 눅눅하게 녹아 버리기 전까지는 무엇이든 더 경험해 볼 수 있다. 마냥 흰 것보다 어느 정도 꼬질한 게 이럴 때는 또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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