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러브레터>와 <윤희에게>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022년 겨울의 어느 날, 폭설이 내렸다. 서울 전역에 눈이 두껍게 쌓였고 눈이 안 내린다던 남부 지방에도 눈이 내릴 정도였다. 새하얀 눈을 밟고 다니는 재미가 있어서 눈이 내리면 항상 즐거웠는데 왜인지 이번에는 즐겁지 않았다.
그건 내가 살고 있는 곳과 관련이 있다. 나는 서울의 모 대학교 근처에 산다. 이 학교는 언덕 위에 있는데, 학교 정문에서 서울 야경이 전부 보인다. 그러다보니 역에서부터 학교 정문까지 가려면 가파른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가야만 한다. 폭설이 내렸을 때는 이 오르막길을 오가는 동안 몇 번이나 미끄러질 뻔했다.
그런데 내가 다니는 학교도 언덕 위에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다니는 단과대가 학교 꼭대기에 있다. 아침마다 수업을 들으려면 ‘헐떡고개’라고 부르는 가파른 언덕을 넘어야 한다. 당연하지만, 같은 서울이니만큼 눈이 많이 쌓였다. 이 말인즉슨 아침마다 눈이 쌓인 언덕을 내려와서 눈이 쌓인 언덕을 올라가야만 등교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코로나19로 비대면 수업만 하다가 오랜만에 대면 수업을 하니 통학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눈까지 오다니. 춥고 질퍽거리고 미끄러운 길을 매일 걸어 다니니까 다리에 쥐가 날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을 주고 걷다 보니까 눈이 얼마나 낭만적인지 느끼기 힘들었다. 눈이 쓰레기로 느껴진다는 말을 듣고 낭만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눈 때문에 힘들게 지내보니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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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눈이 오는 게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눈을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지경에 다다랐다니. 한편으로는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눈에 대한 낭만을 되찾을 수 있을까.
영화 〈윤희에게〉를 좋아했던 만큼 눈에 대한 낭만도 느끼는 편이었다. 홋카이도에 내리는 눈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설경을 보면서 나도 눈이 펑펑 오는 날 홋카이도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온 세상이 희게 변한 와중에 단둘이서 눈길을 걷는 모녀.
처음 이 영화를 보게 된 건 좋아하는 배우인 김희애가 등장해서였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좋아하는 배우가 아닌 다른 부분도 눈여겨보게 되었다. 좋은 음악, 잔잔한 스토리, 그리고 아름다운 설경……. 특히 마지막에 주인공 윤희(김희애 배우)와 그의 첫사랑이 오타루 운하에서 재회하고 함께 걷는 장면은 나에게도 소중한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다.
홋카이도와 오타루 이야기를 하면 또 빠질 수 없는 영화가 〈러브레터〉다. 1999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2022년에도 재개봉될 정도로 한국인들의 인기를 많이 끌었던 영화다.
오래 전 영화라서 그런지 영화의 모든 내용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아직도 주인공이 설원에 대고 “お元気ですか”라고 외치는 장면은 기억에 남는다. 연인이 죽은 곳에 대고 안부를 묻는 장면인데, 영화 전체의 맥락을 보면 이 장면이 더욱 안타깝게 또 낭만적으로 느껴진다. 이 영화를 통해서 홋카이도라는 지역의 매력을 처음 느꼈는데, 겨울 홋카이도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이 영화 덕분에 하게 된 것 같다.
그땐 영화 주인공들이 그렇게 낭만적으로 보였는데……. 지금 다시 그 영화를 떠올려 보니 주인공들이 추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윤희는 어떻게 롱패딩이 아닌 코트를 입고 홋카이도에 갈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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