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처음으로 친구들과 자유롭게 여행을 떠나 본 적이 있다. 난생처음이라 여행에 대해 잘 몰랐던 나에게 이것저것 알려 주고 도와준 친구들 덕분에 교통편도 예약해 보고, 숙소도 잡을 수 있었다. 한참을 떠들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헤어졌는데, 분명 그랬는데…. 집으로 돌아와서 가만히 누워 있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아… 가지 말까.’
내 마음이 왜 그렇게 지킬 앤 하이드처럼 기복이 심했는지 당시에는 알 길이 없었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여행 경험이 워낙 없다 보니 그때는 여행이 주는 즐거움을 몰랐고, 가까운 곳에서 놀아도 될 걸 굳이 돈 쓰면서 가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식의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친구들과 이야기하다가 충동적으로 여행 일정을 정해 버리고 만나서 계획까지 세울 때는 마냥 기대에 부풀어 있다가도 집에만 돌아오면 갑자기 열정이 확 사그라들었다. 가는 생각만으로도 기가 쭉 빨리는 느낌. 이 느낌은 여행 가기 전날까지 이어져 취소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들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돈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이런 마음이 내 머릿속을 더욱 심하게 휘젓고 다녔다. 일정 다 잡아 놓고 통장을 봤더니 잔액이 넉넉지 않을 때는… 솔직히 여행 가는 돈이 아깝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친구들에게는 너무나 미안한 말이지만.
속은 이렇게 심란했지만 들떠 있는 친구들 앞에서 차마 “나 돈이 없어서 이번 여행 가고 싶지 않아졌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 친구들은 나까지 함께하는 모습으로 여행을 떠나서 좋은 추억을 만들어 오고 싶을 텐데, 내가 갑자기 가기 싫다고 하면 이 친구들은 실망과 아쉬움을 떠안고 가야 할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여행 가는 사람에게 그런 마음을 안겨 주고 싶지는 않았기에 어떻게든 몸을 일으켜 짐을 하나씩 챙겼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때 다녀온 여행은 거의 성공적이었다. 모든 상황이 우리의 여행을 받쳐 주지는 않았다. 바다에서 수영할 계획으로 수영복까지 챙겨 갔지만 날씨가 좋지 않아 우리는 수영도 못 해 보고 근처 식당이나 카페에서 떠들다가 숙소로 돌아가야만 했다. 따지고 보면 밖에 있던 시간보다는 숙소에서 놀던 시간이 더 길었다. 우리의 예상에 비해 그날의 상황은 많이 아쉬웠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100% 만족한 여행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로 이 친구들과 이렇게까지 오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나? 낮부터 새벽까지 깔깔 웃으면서 유치하게 놀아 본 적이 최근에 몇 번이나 될까. 그렇게 생각해 보니 이 여행이 그렇게 소중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친구들과 다녀온 첫 여행이라서 그런 건지, 뭔지. 그해 가장 재미있는 기억을 꼽자면 이 여행을 먼저 말할 정도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친구들과 헤어지고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또 생각이 복잡해졌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이번에는 긍정적인 쪽으로 많은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분명 여행은 돈을 쓰러 가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아까워하지 않았나? 자린고비 구두쇠 같던 나는 어디 가고 이렇게 마음이 풍족한 사람처럼 허허실실 웃으면서 집에 돌아가고 있는 거지? 이래서 사람들이 자꾸 여행을 가려고 하는 거구나. 대충 이런 생각. 1박 2일의 짧은 경험으로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바뀔 수가 있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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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여행처럼 형식과 시간이 다 짜여 있는 여행이 아닌 나와 마음이 맞는 친구들 몇 명과 자유롭게 떠나는 여행을 다녀온 후부터는 여행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이 차츰 줄어들었다. 나름 깨달은 점이 있어서일까.
여행을 다녀온 후 가장 많이 느꼈던 것은 나의 세상이 점점 넓어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연예인도 아니고, 재벌집 자식이 아닌 이상 살면서 매일매일 해외로 훌쩍 떠나 볼 일이 거의 없지 않나. 매일 같은 지역, 같은 행동반경에서 같은 패턴으로 살아가는 나로서는 여행을 갈 때마다 평소에는 쉽게 볼 수 없는 것들을 눈과 카메라에 많이 담아 온다. 다녀온 후에 이번 여행에서 담아 온 것들을 사진으로 보거나 머릿속에서 떠올릴 때면, 이 기억이 단조로운 일상에 새로운 환기를 주는 듯한 느낌이 든다.
넓은 세상에 이런 곳도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새롭게 배워 가는 재미도 있고. 콜럼버스가 미지의 대륙을 발견하고 탐험한 것처럼, 나만의 세상에 지도를 하나씩 그려 나가는 것 같다고 말하면 이 기분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여행을 가면 하루 종일 밖을 돌아다니다가 일찍 잠들어서 그런지, 확실히 혼자 있을 때 불쑥불쑥 찾아오던 잡생각도 까먹고 오랜만에 마음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점도 참 좋았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종일 함께 있으니 집에서 혼자 놀 때와는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삶에 잠시 휴식기를 걸어 두고 제2의 삶을 잠시 맛보는 기분이었다. 여기는 나를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으니까 남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도 없어지는 것 같고, 왠지 여행을 온 이 순간만큼은 내 마음대로 즐겨도 될 것 같은 자유도 느껴졌다. 여행을 가면 ‘살면서 언제 또 이런 날이 오겠어’라는 생각이 문득 들 때가 있는데, 이 생각 때문에 여행이 더 소중한 기억으로 남는 게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여행을 다녀오면 무엇보다도 보람찬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다녀오길 잘했다는 느낌? 이제 여행을 몇 번 다녀서 여유가 생긴 건지, 한번 여행을 갈 때는 내가 쓴 비용 그 이상의 값어치를 즐기고 오는 것 같다. 왕복표와 숙소를 예약하느라 막상 출발할 때 돈이 부족한 채로 여행을 떠난 적도 있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즐거움이 있었다.
숙소 앞 바다에 가서 10분 동안 SNS에 올릴 사진만 왕창 찍고 와도 그저 그 상황이 재미있다며 웃었고, 동네에서 먹을 수 있는 떡볶이 체인점을 여행 가서까지 먹은 적도 있었지만 이 집은 왠지 맛이 특별하다고 의미 부여를 하면서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그러다 해가 지면 숙소에서 밤새 떠들며 시간을 보냈는데, 사실상 별 볼일은 없었지만 이 여행에서만큼은 일상에서 찾기 힘든 그날만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옛날의 나였다면 이런 여행은 돈이 아깝다며 속으로 툴툴댔을 게 뻔하다. 사실 지금도 그 생각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해서 여행을 가면 꼭 내가 돈을 쓴 만큼 본전을 찾아야 한다며 하루 종일 지칠 때까지 돌아다니기는 하지만, 이런 여행을 겪어 보니 꼭 이곳저곳 구석구석 돌아다니지 않아도, 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가는 것만으로도 많은 추억을 남길 수 있다는 걸 잘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북마크 해 뒀던 지역 맛집이 하필 내가 간 날에 휴일 공지를 올리고, 풍경이 멋진 곳도 하필 내가 간 날에 날씨가 좋지 않아 제대로 감상할 수 없더라도 너무 속상해하지는 않기로 다짐했다. 맛집 근처에 있던 식당 아무 데나 들어가서 먹은 밥, 우중충한 풍경들이 내 카메라에 담기면 그것도 다 새로운 추억으로 남게 될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