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런 현실 도피라면 나쁘지 않다. 누구든 잠시 도피할 구멍이 한 군데는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부자들은 집 밑에 벙커 하나씩은 두고 산다고 한다. 사람에게는 피난할 곳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거다. 그것은 현실 감각을 무디게 한다기보단 오히려 현실에 더 충실할 수 있게 한다.

 태권도를 하는 시간에는 바깥세상에서 가져온 불안이나 욕심 같은 건 깨끗이 비우고 몸의 움직임에만 집중할 수 있다. 도장 안에서의 경쟁은 무의미하다. 줄 세우기도 평가도 없을뿐더러 누구에게나 공평한 칭찬이 그런 것들을 못 보게 한다. 덮어놓고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나를 크게 안심시킨다.

 나는 그 시간 동안 마음껏 느슨해지는 동시에 순수하게 열중할 수 있다. 그러고 나면 복잡했던 머리는 정리되고 어떤 일이든 잘 될 것만 같은 이상한 긍정 회로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이런 시간이 일주일에 세 번은 보장되어 있다는 심리적인 안정감은 내겐 뭔가를 지탱할 수 있는 중심이 되는 듯하다. 그리고 중심이 잡힌 나는 비로소 설 수도 있고 주먹을 뻗을 수도 있고 발차기도 할 수 있다.

 사실 지금은 태권도를 처음 배우기 시작했을 때만큼 모든 것이 새롭고 설레지는 않는다. 꾀부리면서 동작을 대충 할 때도 있고 사범님들도 일 년씩이나 다닌 수련생에게 예전만큼의 관심과 칭찬을 퍼붓지도 않는다.

 그래도 여전히 태권도는 바쁜 와중에도 포기할 수 없는 거의 유일한 피난처이자 활력소이다. 태권도는 정신의 무술이라고 하던데, 내가 정신을 수양하는 단계까지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도 태권도가 단순히 신체 강화만을 위한 운동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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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자정리. 만남에는 반드시 이별이 온다.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동시에 죽지 않는 한 우리는 헤어져야 하는 순간을 겪는다. 인류가 단 한 번도 극복하지 못한 필멸자의 삶! 모두가 이런 일을 겪으니, 우리는 고인의 마지막을 여럿이 모여 식(式)으로 치루며 감정을 추스르고, 아직 죽지 않은 자들과 함께하는 일상으로 돌아온다. 비록 그 자욱은 영원할 지라도 그저 품고 간다.

 하지만 필멸의 명제에 계속해서 격하게 저항하는 사람들이 이따금 존재한다. 너무도 사랑했던 그 사람을 잊지 못하는, 그 부재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 아내와 사별하고 그저 술독에 머무는 아저씨 이야기, 자식을 잃고 정신을 잃어버린 부모…. 무신론자조차 신에게 분노하고 빌기도 하고, 그의 부재를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끊어버렸다는 이야기도 가끔 들을 수 있다.

 넷플릭스 시리즈 <애프터 라이프 앵그리맨>의 주인공 ‘토니’도 그렇다. 그의 인생의 활력소 그 자체, 아니 그 이상이었던 아내가 떠났다. 웃음과 즐거움은 그것을 즐기던 이가 떠나가자 자연히 그 주인을 따라가 버렸다. 남겨진 자리에는 적막과 고독 그리고 토니 뿐. 그는 자신의 남은 삶을 ‘보너스 라이프’로 명명하고 소진할 것을 마음먹고 괴이한 행동을 보이다가 아내를 따라가고자 마음먹는다.

 비슷한 사람이 다른 영화에도 있다. 어쩌면 토니보다도 심각한 인물이다.  바로 영화 <오베라는 남자>의 주인공 '오베'다. (인상이 토니와 비슷해서 굳이 사진을 넣지는 않겠다. 머리는 더 하얗다)

 오베도 아내를 잃은 상황이다. 그래도 토니는 직장도 있고 아내가 남기고 간 반려동물도 있지만 오베는 좋게 말하면 ‘아내바라기’, 현실적으로 보면 아내 외의 다른 사람들과는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다. 오베는 삶이 무가치하다고 느끼고, 역시 자살을 계획한다.

과연 이들은 어떻게 될까. 아무래도 이야기의 초반부가 절망이라면 점차 희망으로 뻗어나가는 익숙한 전개가 예상될 것이다. 현실의 씁쓸한 부고 소식들과 달리, 작가가 창작한 세계는 독자들에게 작가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메시지는, 아무리 뭐라 해도 최고 활력소는 역시 사람이라는 것, 여기서 조금 더 가게 되면 사람은 사람으로 잊어야 한다는 이야기 같은 것이다.

 스포일러를 주의하시라! 결론부터 말하자면 앞서 예상했듯, 사랑하는 아내와의 이별을 경험하고 삶의 목적을 상실한 두 남자는 결국 자살을 포기하고 인생의 다른 국면을 향해 나아간다. 행복과 끔찍한 고통까지도 주던 인간관계가 또 그들의 삶의 활력소가 된 것이다.

 토니는 직장-지역 신문사에서 취재 대상인 동네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 자신의 보너스 라이프를 낭비해버리고자 했던 결심은 어느새 그들과 함께 나누며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오베라는 남자>의 작가 또한 오베에게 새로운 사람들을 선물해준다. 옆집에 이사 온 파르베네네 가족이다. 임산부인 파르베네는 살가운 성격으로 이 괴팍한 독거노인을 세상으로 끌고 나온다. 거부하던 노인은 점차 세상에 나올 이유와 용기를 얻는다. 옆집 가족들을 시작으로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도 만들어가는 오베. 그는 아내의 무덤 앞에서 삶이 그다지 나쁘지마는 않다고 말한다.

 어쩌면 이런 결말은 뻔해 보인다. 그리고 현실적이기보다는, 동화에 가깝다. 세상은 우상향하는 두 이야기처럼 그리 따뜻하고 살갑지 않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냉담하다. 사람은 참 예측 불가능하기에 그런 것 같다. 지하철 맞은편에 앉아있는 저 사람도, 강의실에 앉아있는 이름 모를 학우도 마찬가지다.

 토니와 오베도 그런 두려움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 또한 이웃들에게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리고 시작했다. 동화 속에 나오는 아주 유치한 것들을- 다가가기, 발견하기, 우정과 사랑.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동화에서 이미 다 배운 것 같다. 한치 앞도 모를 막연한 세상에서 슬픔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람에 다가가 사랑하는 이야기. 그리고 이런 수많은 이야기들을 관통하는, 회자정리와 그 친구인 ‘거자필반.’

 -떠남이 있으면 반드시 돌아옴이 있다. 영화, 소설, 드라마 등 어릴 적부터 접해온 수많은 사람 이야기들은 ‘회자정리 거자필반’의 교훈을 담고 있는 듯하다. 이 두 사람을 보면서 세상의 덧없음에 너무 슬퍼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하고, 토니의 이야기로부터는 내 직업으로부터 한 번 관계를 넓혀보겠다고, 오베의 이야기로부터는 이웃과 교류를 해보겠다고 마음먹어본다.

 가장 어린 시절부터 배워온 교훈을 새로운 이야기들로 되새기고 상기한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지난 사람에 너무 슬퍼하지 않고, 새로운 사람들에게 용기 내어 다가가자. 사람에겐 사람이, 서로가 가장 활력이 되어준다는 걸 기억하자. 이렇게 살자, 이렇게 살자…. 어쩌면 나의 삶 또한 그런 동화 같은 이야기에 가까워지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오늘도, 이런 사람 냄새 나는 ‘클리셰적인’ 이야기들을 지나치지 못한다.

(퇴고 with 유안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