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동대문으로 이사를 온 뒤, 우리 가족은 근처 사는 막내고모와 부쩍 친해졌다. 부모님이 고모댁에 다녀올 때마다 새로운 물건들이 생겼다. 화려한 접시들, 커피포트 같은 것과 심지어 고모가 안 쓰던 꽤 신형 에어컨까지. 좀처럼 물건을 사지 않는 우리 집에 고모만큼 좋은 분이 또 있을까.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고모의 신문물들을 이용하고 감사의 카톡을 보내곤 했다.

 “고모는 진짜 착하신 것 같아요.” 컵라면을 까놓고, 고모가 준 포트 안에 물이 보글거리는 걸 보며 말했다. 엄마는 차를 한 입 마시고는 말했다. “그렇지. 아무래도 고모는 여유가 있으셔서 그래. 멋진 분이야.” 엄마는 대개 착한 사람은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능력 없고 시간 없으면 자기 일만 해도 바쁘잖아. 남까지 살피고 돕는 건 성품도 있지만 특히 여유의 문제야.”

 최근에 이날의 컵라면 대화가 갑자기 생각난 건, 내가 누군가에게 착한 사람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두 달 정도 일하고 있는 키즈카페에 새 알바생이 들어왔다. 자그마치 스무 살. 딱 봐도 앳된 얼굴이었다. 낯설고 연상인 직원들에 긴장했지만 티를 안 내려 노력하는 게 티 나는 귀여운 얼굴이었다. 스무 살의 풋풋함이 너무 오랜만이라 내심 친해지고 싶었다.

 나는 홀-기구 관리 쪽이고 그는 카운터-음료제조 쪽이었다. 하지만 업무가 유동적인 편이라 나도 카운터와 음료제조는 나름 할 줄 알았다. 그가 혼자 카운터에 덩그러니 서 있을 때 이것저것 레시피와 알바 팁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번번이 홀에 문제가 생겨서 달려가게 되었다. 결국 착한 선배 코스프레도 못해봤고, 똘똘한 그는 알바 2일차에 어느새 내가 모르는 레시피의 음료도 만들고 있었다.

 홀을 돌면서 그에게 어떻게 말을 걸까 오래 고민했다. 시뮬레이션을 계속 했다. 그러나 막상 카운터로 돌아가, 홀 업무에 기진맥진해진 내 입에서 툭 튀어나온 말은 격려도 아니고, “일은 어때요?”처럼 관망할 줄 아는 베테랑 같은 대사도 아니었다. 그는 아이스 초코 라떼를 만들고 있었다. 그를 보자 영 바보 같은 질문이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왔다. “혹시 휘핑 잘 올려요?”

 난 여전히 휘핑크림을 잘 못 올렸다. 기회가 되면 제대로 배우고 싶었던 게 이런 질문으로 나온 것이다. 민망해서 괜히 주절거렸다. 전 휘핑을 잘 못 올려서…. 그는 내게 두 눈을 반달처럼 웃어보이며 말했다. “저도 아까 배웠어요. 지금 하는 거 보실래요?” 아아, 그대는 천사인가요. 그의 휘핑은 한라산 같이 아름다운 모양새였다. 속으로 생각했다. 어머니, 이제야 그날의 말뜻을 알겠습니다. 저는 여기서 착한 사람은 못 되겠군요.

 그는 내가 지쳐보인다며 금세 같은 음료를 만들어주었다. 똑똑하고, 그래서 오히려 그가 내게 착한 사람이 되었다. 동시에 나는, 만난 지 이틀 만에 휘핑 못 올리는 것도 들키고 졸지에 음료까지 받아먹은 염치없는 선배가 되었군. 좀 좋게 봐도 솔직해서 귀여운 선배 정도였다. 그가 만들어준 달달한 초코라떼와 달리, 마음 한 켠이 퍽 씁쓸했다.

 어쨌거나 나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친해지고 싶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는 나보다 능력이 좋았다. 그러나 여유는 꼭 능력에서 나오는 것만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몇 주 뒤, 나는 한 카페 안에서 그에게 “안수 쌤(키즈카페 직원 호칭)은 너무 착하세요.”라고 들을 수 있었다. 그 비결은, 역시나 여유가 있어서였다. 적어도 지갑에는.

 데이트 신청처럼 접근했다. 오늘 퇴근하고 바빠요? 안 바쁘면 빙수 먹으러 갈래요? 한마디 더 붙였다. 제가 쏠게요! 거의 졸업생 학번이라서 새내기랑 밥약하는 느낌은 오랜만이었다. 빙수를 다 먹고는 허니브레드도 추가로 주문했다. 맛있게 먹는 그를 보다가, 문득 카드 잔액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번 달 실비보험료와 교통비 결제대금이 자동이체가 곧인데….

 갑자기 불안해져 알림을 보는 척, 은행 앱을 열어 카드 계좌의 잔액을 확인해본다. 다행히 앞으로 -5일간이나- 한 푼도 안 쓴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액정이 안 보이도록 테이블 위에 폰을 탁 엎어놓고 빙긋 웃었다. 하지만 사실 속으로는 광광 소리지르고 있었다. 지겨운 좀생이 인생! 걱정이 많아 마음에서까지 여유가 없다. 여유 없는 웃음은 티가 난다. 이런 나를 보고도 착하다고 말해주는 그가 착한 사람인 것이다.

 그날 컵라면 대화의 말미에 엄마에게 물었다. “그런데 가난하고 바쁜데도 타인을 잘 도와주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 사람들은 착한 거 아닌가요?” 엄마는 대쪽같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만약 자기 일도 제대로 못 하면서 남에게 착하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그 사람은 호구야. 반드시 언젠가 묵혀둔 자기 일이 터지게 되어 있어. 그때는 남탓도 못해. 스스로 터져버리는 거야. 장담컨대 그건 시간문제야. 그 순간 엄마가 아주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노을이 질 무렵 그와 카페에서 나오며, 새삼 엄마의 그 눈빛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그건 능력도 없고 돈도 없고 마음의 여유도 없는 딸내미에게 보내는 일종의 시그널이었다. 호구처럼 살지 마! 이제야 깨달았다. 엄마가 하는 말들은 나를 겨냥한 경우가 많구나. 세상에, 나는 눈치도 부족하다. 이번 생엔 착한 딸도 글렀구만. 그래, 나는 착할 여유가 없다. 인정한다. 새로이 결심해본다. 여유도 없이 착하려는 호구는 그만두어야지….

 그런데 그 친구에게서 카톡이 왔다.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 감사해요(하트)’ 으아, 너무 사랑스럽다. 다음에도 같이 뭐 먹으러 가야지…. 순간 나의 사고의 흐름에 스스로도 벙쪘다. 왜 항상 나는 가까운 이들에게 (쥐뿔도 없는데) 뭔가를 해주고 싶을까? 사랑의 양만큼은 여유로워서 그래, 가슴 속에서 혼자 이유를 대본다. 엄마, 사랑이라도 여유가 있으니 그냥 호구는 아니지 않을까요. 물론 엄마의 답이 뻔히 예상되기는 하다만. “이유를 대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여유가 없는 거란다!”

🧡🤫🖤

 정말 안착한, 착하지 않은, 착함과 거리가 먼 여성들이 떠오른다. 내가 가장 재밌게 본 넷플릭스 작품 중 하나인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의 인물들이다. 여자 교도소를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엔 다양한 인종, 다양한 성적 지향, 다양한 배경, 다양한 서사를 가진 여성들이 등장한다. 이렇게 다양한 여성들의 공통점은 모두 범죄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갇혀있다는 것.

 범죄자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모두 착하지 않은 캐릭터들이라는 것이 별로 놀랍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범죄자이기 이전에 보통의 인간, 그중에서 다소 나쁜 선택을 한 인간들이라는 너그러운 관점에서 보고 싶다. '다소 나쁜 선택을 한' 인간들이 모여 있는 이곳은 또 한 번 강조하자면, 교도소이다. 교도소는 자원이 희소하다. 추가로 작 중 배경은 미국이다. 자본주의 끝판왕인 미국이란 국가에서 교도소라는 공적 시설조차 민영화라는 자본의 룰을 피할 수 없다. 민영화된 교도소는 자원이 희소한 동시에 자본주의의 축소판으로 작용하는 생존 게임의 장이 된다. 사적 공간이 전부 노출되어 있으며, 교도관의 감시가 24시간 이루어지고 있고, 본인을 포함해 서로가 범죄자라는 사실에서 오는 긴장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서 내부의 여성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고 생존하고자 노력한다.

 이 과정에서 착한 캐릭터는 없다. 극 중 레드라는 인물은 수감 전 자신의 가게를 성공적으로 운영하던 솜씨 있는 요리사였다. 죄를 짓고 수감된 레드에게 유일한 삶의 낙은 감옥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수감자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이는 일이다. 그러던 중 주방을 통해 금지 물품을 들여오던 것이 상부에 발각되고 결국 수감 생활 중 유일한 기쁨이었던 주방일을 빼앗기게 되고 레드의 대체로 라틴계 수감자들이 주방 사역 일을 배정받는다. 이 일에 앙심을 품은 레드는 라틴계 수감자들이 주방일을 원치 않도록 만들기 위해 밤에 잠입해 다음 날 사고가 나게 끔 주방 기구를 조작해둔다. 하지만 레드의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발생한 사고로 다치게 된 것은 라틴계 수감자들이 아닌 그녀의 친구인 지나였고 이를 계기로 레드는 친구였던 지나와 라틴계 수감자들 모두를 적으로 돌리게 된다.

 라틴계 수감자들 중에는 다야라는 어린 여성이 있다. 본인의 친엄마와 함께 수감된 다야는 어릴 적부터 열악한 가정환경에서 자랐고 결국에는 그의 엄마처럼 경범죄를 저지르고 수감된 인물이다. 수감 생활 중 젊은 남성 교도관과 사랑에 빠진 다야는 결국 그와 성관계를 가지고 임신하게 된다. 교도관과 수감자의 성적 관계는 법적으로 엄중히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다야의 임신 사실이 들키는 순간 다야가 사랑하는 교도관은 법적 처벌로 감옥에 가게 된다. 원치 않는 임신과 동시에 다야를 압박하는 외부적 상황에 힘겨워하던 그는 결국 노련하고 경험 많은 중년 여성인 레드에게 도움을 청한다. 둘의 사이가 좋지 않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레드는 진심을 다해 다야를 돌봐주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조언과 도움을 제공한다.

 레드는 자신의 욕망과 욕심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리는 인물인 동시에 순수한 동정심과 공감에서 비롯한 도움을 베풀 줄 아는 인물이다. 레드는 그럼 착한 캐릭터인가 그렇지 않은 캐릭터인가? 답은 '착한 캐릭터는 없다.'이다. 동시에 선한 사람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통해 행동하며 때로는 모든 인간이 그렇듯 동정심이나 사랑이나 그런 여러 가지 이유로 선한 선택과 행위를 하기도하고 반대의 행위를 하기도 하는, 그런 것이다. 뻔한 이야기이다. 세상 사람들은 '착함'과 '안착함', 이 두 이분법적인 기준으로 명확히 나뉠 수 없다. 사람은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느끼는 살아 숨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명백하고 뻔한 기준은 여성 서사에 도입하는 순간 색다르고 새로운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 일명 오뉴블이 여성 서사 작품으로 찬사를 받는 이유 또한 동일하다. 단지 착하기만 혹은 나쁘기만 한 평면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주를 이루었던 기존의 미디어의 여성관의 절대적인 경향을 전복시키고, 입체적 여성 캐릭터들을 창조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점에서 그러한 찬사를 받는 것이다. 그동안 드라마나 영화든 대중문화, 미디어에서 여성의 이야기는 절대적 수부터 부족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나마 있는 여성 서사조차 서사로서의 기능을 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문화예술 같은 창작물에서 지금까지 재생산되고 반복되는 성차별적 양상으로 여성 캐릭터에 대한 '성녀와 창녀' 구분이 있다. '성녀와 창녀'의 구분이란 직관적으로 이론의 명칭에서부터 드러나듯이 서사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성녀라는 용어로 대표되는 착함, 모성적, 유약함 등의 사회가 여성에게 보편적으로 요구하고 평가하는 기준을 따르거나 그러한 사회적 문법을 따르지 않는 캐릭터로 나뉜다. 전자의 경우 성녀로, 후자의 경우에는 창녀로 명명된다. 이러한 기준에 의해 성녀라는 캐릭터 성을 부여받는 인물은 작품 속에서 칭송받거나 보호받는 대상으로 그려진다. 역으로 창녀 인물은 도덕적 잣대라는 명목으로 징벌을 받거나 비난을 받는, 혹은 물리쳐야 할 악마적 대상으로 묘사된다. 오뉴블은 큰 시사점은 미디어 전반에 지배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이러한 성녀 창녀의 이분법적 구성을 따르지 않고 살아 숨 쉬는 인간으로서 여성 캐릭터들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 있다.

 '인물이 입체적이다.'라는 것은 다시 말해 실제로 있을 법한, 실제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우리는 과연 실제 현실에서 입체적으로 살 수 있는가? 미디어는 세상을 담아내기도 하고 세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러한 미디어에서의 성차별적인 시선은 실제 세상에서 온 것이다. 동시에 그러한 세상을 다시 미디어라는 대상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그것에 따르고 반복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에 대한 기준을 반영하고 또 그것을 효과적으로 재생산하는 기존의 미디어가 보여준 여성의 모습이 현실속에서 여성관에 대한 억압으로 작용해왔으며 이 것이 우리 스스로를 착한 여성 혹은 안착한 여성으로 분류하고 그 속에 충실히 자신을 끼워맞추게 하는, 선후 관계가 반전된 일들이 만연하게 우리 사회에 기저 하는 문법이 되었다는 사실은 너무도 명백하여 외면할 수 없다. 오뉴블이 그렇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러한 현상에 대한 여성들의 무의식적인 불만족을 해소해주었기 때문 아닐까. 우리의 '진짜'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우리답게 살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오뉴블의 캐릭터들이 성녀와 창녀 구분을 벗어나 한 인간으로서 작품 속에서 숨 쉴 수 있었듯이 우리도 이제 착함과 안착함이라는 여성에 대한 기준에서 벗어나 세상을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되찾아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