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에게 시작을 표현하는 단어는 두 가지였다. '똥'과 '저림'.

 평생 이 두 가지로만 시작을 이야기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별안간, 새로운 단어가 추가되었다. ‘방황’이다.

 이건 내 시작에 관한 이야기다. 내게 시작은 이렇듯 세 단어로 압축된다.

1. 8세, 글 인생 시발점 ‘똥’

 (웩) 뭐야 시작이라면서 대뜸 웬 똥이야?라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나에겐 그만큼 이토록 더럽고 원초적인 단어가 거진 인생을 바꾸어놓았으니, 더러움을 잠시 참고 읽어보시라. 나라는 사람을 하나씩 해체해봤을 때, 몸을 구성하고 있는 대다수의 신체조직을 제외하면 남는 알맹이는 단연 글이다. 우선 글로 밥을 벌어먹고 살고, 글로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고, 도무지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서 쓰고 또 쓰니까. 인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이 글을 어떻게 시작했는지 이야기하려면 무려 20년 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때의 나는 여느 아이들처럼 '똥'이야기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1학년. 마냥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모아 두고 담임선생님은 글쓰기 숙제를 내주었다. 주제는 물. 다른 아이들은 비, 마시는 물, 등등을 떠올렸는데 나만 유독 변기에 꽂혀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변기 안에 있는 물에 대해 생각했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여하튼 나는 물, 변기, 똥 순으로 글감을 떠올렸고 똥의 일대기를 여덟 칸 공책에 적어 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글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누군가 배설해낸 똥이 변기에 들어가 물과 함께 흘러갔는데 배수관을 타고 가다 하천을 만났고 하천에서 강으로, 강에서 바다로 흘러가 자유로워진다는 내용.

 선생님은 숙제를 내주고 며칠 뒤, 여덟 칸 공책을 펼쳐보더니 나를 교단 앞으로 불러 세웠다. '너무 잘 썼다. 나중에 작가 해도 되겠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어?' 이 세 음절을 끝으로 나는 반 아이들 앞에서 박수를 받았다. 그때 처음으로 온몸이 저리다는 느낌을 알게 되었다. 너무 저렸다. 행복해서. 실명을 공개할 순 없으니까 속으로 삼키겠지만, 그 당시 담임선생님의 성함을 똑똑히 기억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더듬더듬 그 이름을 잊지 않으려고 몇 번씩 읊어보곤 한다.

 꿈을 스스로 꾸는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는 타인을 통해 꾸거나 타인이 심어주기도 한다. 여덟 살 그해 봄, 나는 글을 써야 하는 사람임을 자연스레 직감했다. 그때부터 '글 쓰는 사람'이 되기 위해 자발적인 독서를 시작했다. 부모님도 기다렸다는 듯 틈만 나면 책을 사주었다. 이게 내 글의 시작이다. 다소 충격적일 만큼 더럽지만, 그래서 때로 나의 기원이 귀엽기도 하다. 여덟 살쯤에나 용인이 가능한 사유니까.

2. 나의 시작 메이트 ‘저림’

 여덟 살, 박수 세례를 받은 이후로 무언가 시작하게 되면 나타나는 몸의 증상은 '저림'이다. 느끼는 감정에 따라 저림의 증상은 각각 다른 신체 부위로 찾아온다. 나는 옛사람들의 말을 가끔 되짚으면서 감탄하기도 하는데, '오금이 저리다'는 말이 참으로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지나친 공포심이 있을 때나 면접처럼 중요한 대담을 시작할 때는 오금이 저리기 때문이다. 특히나 팔이 접히는 부분이 저려서 습관적으로 팔짱을 낄 때가 있다.

 그런가 하면, 너무 좋을 때는 가슴팍 앞쪽이 저릿저릿하다. 간질간질로 표현하기에는 조금 더 강도가 세고 소름이 돋을만한 느낌이라 저리다고 표현하는 게 옳다. 이런 기분을 느낄 때는 저림의 증상이 귀 뒤까지 뻗어나가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나는 주제와 분야에 상관없이 시작과 동시에 빠져든다. 그렇게 해서 빠져든 것이 '콘텐츠'다. 맥락이야 글과 비슷하지만, 콘텐츠는 글과 그림, 영상처럼 다양한 것과 결합해서 하나의 결과를 도출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여즉 콘텐츠를 제작하는 사람들 곁에 기웃거리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을 새로 만나는 것도 인생사의 또 다른 시작이라고 한다면, 나는 사람을 만날 때도 저림의 증상을 느낀다. 사람에 따라 증상이 발현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첫 느낌에 마음에 들면 손 끝이 저리다. 그래서 해야 할 말들을 속으로 정돈하며 손끝을 꾹꾹 누르기도 한다. 그것을 들키기 싫어서 추운 계절엔 괜스레 추위를 타는 척했던 날들도 있다. 이렇게 쓰다 보니 몸에 이상이 있는 사람쯤 여겨질 수도 있지만,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당신 인생의 순간들을 떠올려보시라. 분명, 한 번쯤 오랜 시간 무릎을 꿇고 있지 않았는데도 몸 어딘가 저렸던 기억이 있을 거다. 그건, 그 순간이 너무 강렬했다는 증거다. 나는 대체로 중간과 끝보다 시작에 강렬함을 느끼는 사람이다. 내게 모든 시작은 두렵고, 설레고, 강렬하고 때로 인생 전체를 흔들어 놓기도 한다.

3. 20대 후반, 새롭게 등장한 트리거 ‘방황’

 최근에는 오금도, 가슴팍도, 손끝도 아닌 저림의 순간을 느꼈다. 단전에서 느껴지는 저림은 꽤 사람을 불안하게 했는데 무언가 끝나가고 있음을, 그리고 방황의 시작을 맞이했음을 알아챘다. 짧은 인생의 경험으로 추측했을 때, 이럴 경우 가만히 멈춰 있으면 그대로 가라앉을 확률이 절반 이상이었다. 이상하다, 사춘기도 한참 전에 지났는데! 지금보다 더 어릴 때와는 달리 20대의 방황은 ‘삶은 무엇인가’처럼 심오한(?) 관점으로 찾아왔다. 일상은 재미없고 그렇다고 뭘 안 하기엔 뭣한, 그런데 미래는 안 보이는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래서 단전의 저림을 가슴팍의 저림으로 바꿀 수 있는 새로운 시작이 필요했다. 방황의 길에서 잠시 잠깐이라도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저림을 멈출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있었다.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번다는 것은 생각보다 지겹고 때로는 비극적일 때가 있다. 나는 글을 좋아하지만, 글로 돈을 번다는 건 전업 작가나 프로 작가가 아닌 이상, 내가 쓰고 싶은 걸 쓰지 못한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인생 절반의 글을 좋아하면서 때론 싫어했다. 같은 이유로 따로 만나 글을 읽자던, 글을 쓰자던 모임 제안들을 모두 거절하고 지냈다. 그러다가 이름에 끌려 이곳에 안착하게 되었다. 가라앉을지 모르는 적절한 타이밍에 건져진 셈이다.

 안착하고 안착하길 바라는 여자들. 여기에서 글의 또 다른 시작을 하려니 미묘히 저림이 반전되는 것을 느낀다. 내 첫 번째 시작은 '똥'이었다면 두 번째 시작은 '저림', 마지막은 ‘방황’일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단어들이 영 부정적인 것 같아 신경이 쓰이지만, 시작의 계기나 그 의미는 각자 다른 법이니까. 대체로 모든 시작은 내게 좋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니 이번의 저림도 내게 좋은 것들을 가져다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