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반이다

 시작이 반이다. 나는 그 시작을 손쉽게 해낸다. 그러나 시작뿐이다. 작업물을 일정에 맞게 제출하는 건 힘든 일이다. 마감일을 지키지 못하면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피해가 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꾸역꾸역 마감일을 지켜내야 한다. 손쉽게 시작한 탓에 마감일이 많이 겹쳐 할 일이 몰렸을 땐 말 그대로 머리를 싸매며 글을 쓰기도 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그래도 마감을 해낸 뒤에는 괜찮은 결과물이 남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살았다. 그 충동성과 스트레스가 병증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충동적으로 일을 벌리기도 하죠? 그래서 나중에 힘들어지고요.” 정신과 의사가 내게 말했다. 불안과 우울 증상으로 병원에 간 뒤 내게 맞는 약을 찾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게 문제인가? 쉽게 일을 시작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더니 의사가 내게 그림을 그려 주며 말했다.

 “평소에는 이렇다가,” 그는 직선을 쭉 그린다.

 “갑자기 이렇게 되는 날이 있고,” 볼펜으로 그은 선이 종이 위쪽으로 훅 솟구친다.

 “그러다가 이렇게 푹 낮아지죠.” 솟구쳤던 선은 다시 종이 아래쪽으로 곤두박질친다. “이런 감정 기복이 일상생활에 문제를 주고요.”

 생각해 보면 그랬다. 지나치게 쉬운 시작은 삶에 문제를 주었다. 가령 학교에서 기회를 잡았던 조별과제 조장이며 발표의 경우, 사실 교수님이 가산점을 준다고 말하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교수님은 그냥 지원자를 받았고, 그게 확실하게 가산점으로 들어간다고 말씀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나는 그 짧은 시간 안에 나한테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만으로 지체 없이 손을 들었고 발표자며 조장 같은 것들을 맡게 되었다.

 활동도 그렇다. 지금 하고 있는 활동만 해도 다섯 개나 된다! 모든 활동이 충동적으로 신청한 활동이다. 상식적으로 동아리가 서너 개쯤 되면 그 후에 신청하는 활동은 더 진지하게 고민했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재밌어 보인다는 이유로 한순간에 폼을 제출해 버렸다.

일을 벌린 결과는 내게 정직하게 돌아왔다. 아침 일찍 학교에 가서 공강 시간 내내 과제를 하고 수업을 듣다 집에 돌아와서 강의를 들으면 하루가 끝났다. 그냥 끝나버렸다. 그런데 끝나기만 하면 다행이다. 얼마 전에 발표 준비 때문에 세 시간만 자고 학교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 강의실에 앉아 꾸벅꾸벅 졸면서 한 생각이 있었다. 한계다. 일을 너무 많이 벌렸다. 안 해도 되는 과제는 하지 말걸…….

 병원에서는 내게 충동 조절을 도와주는 약을 처방해 줬다. 수업이 끝난 뒤, 약을 꼬박꼬박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휴게실에서 잠에 들었다.

*

 시작이 반이다. 그런데 말 그대로 반일 뿐이다. 일을 끝내는 일은 시작하는 일만큼 어렵고, 시작한 후 일을 이어나가고 끝내지 않으면 그냥 반쪽짜리 무언가밖에 남지 않는다. 나는 결국 잠을 세 시간 자고 발표를 마무리했지만…… 그 과정은 내게 너무 버거웠다.

 아침 8시에 집을 나서던 어느 날 엄마가 내게 아이돌이냐고 물었다. 스케줄이 왜 이렇게 빡빡하냐고. 그러게, 정신 차려보니 그렇게 됐어.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대답했다. 그래도 내가 벌린 일이니 어쩌겠어. 조금만 있으면 대외활동이 끝나니까 조금만 더 버텨 봐야지.

 그러던 어느 날, 수많은 시작으로 인해 몇 시간 자지 못하는 삶이 반복되어서일까, 아니면 병원에서 든 약이 드디어 효과가 든 걸까. 어느 순간부턴가 나에게도 무언가를 충동적으로 시작하지 않을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발표 과제가 있는 수업이었다. 전체 발표인 줄 알았는데 다행히도 선택 과제였다. 교수님께서는 발표자에게 가산점을 부여한다고 하셨고, 많은 학우들이 발표를 할지 말지에 관해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발표자에 지원하려고 했다. 그러던 중, 머릿속에서 지금까지 발표 준비를 하며 겪었던 수많은 고난이 스쳐지나갔다. 예전 같았으면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하며 고민 없이 첫 발표자 자리에 지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조금 달랐다.

 “교수님, 11주차 발표자에 지원하겠습니다!”

 첫 타자가 아니라, 11번째 타자였다. 시작을 아예 안 한 건 아니지만, 내 스케줄을 고려해서 시간이 널널한 때 발표를 잡았다. 고민을 하고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다이어리에 일정을 업데이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