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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 순간의 선택 하나하나가 시작이다. 그 모든 시작에 따라 인생은 바뀌고 있다. 지금 이 글의 한 글자 한 글자를 쓸 때마다, 인생은 이전의 순간까지의 인생과는 별개다. 일상에서 이를 의식하고 살기는 쉽지 않다. 모든 것에 지나치게 몰입하며 살 수는 없으니 말이다.

  다만 중대한 결정인 경우, 우리는 그것이 일생은 건 결심이라는 걸 강렬하게 인식하기도 한다. 때로는 다른 이에게 이 시작의 중요성을 선언한다. 이 경우에서 두 여성이 떠오르는데, 바로 소설 <체공녀 강주룡>의 주인공 주룡과 요즘의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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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공녀 강주룡>의 주인공 강주룡은 굳은 심지를 가진 여성이다. 그는 남편과 독립군에 합류했다가 남편을 잃고 온갖 우여곡절을 거쳐 가족에게 돌아가지만, 자신을 늙은 양반의 첩으로 팔려는 부모를 떠나와 평양의 ‘평원 고무 공장’의 노동자로 일하게 된다. 여공 노동조합의 시위를 몇 번 지켜보던 주룡은 조합에 가입할 결심을 굳힌다. 동료인 삼이에게 말한다.

  “내래 보통 단원이 되지 아니할 거이간. 삼이니, 내 우에 계속 가입 미뤘는디 모르갔어? 내래 일생을 걸 결심이라야 가입하는 거이 마땅하다 여겨서 여즉 가입 안 한 거이야.”

  일생을 걸 결심. 이걸 당당하게 말할 정도로 주룡은 명료하고도 멋진 사람이다. 여기에 더해 가입한 이날, 신입 조합원이 결의 발언을 발표할 시간이 주어지자 주룡은 곧장 나가서 선언한다. 그는 어마어마한 발언을 한다.

  “반갑습네다, 동지들. 평원 고무 공장 장부공 강주룡이 인사드립네다. 내래 차기 평양고무직공조합의 장이 되려구 가입했습네다.”

  주룡이 조합 가입 원서를 낸 것처럼, 올해 7월 나는 오랜 고민 끝에 문과대의 한 학과로의 전과를 신청했다. 신청 첫날부터 전과 동기를 작성했고 마지막 날까지 열심히 고쳐 3천자를 가득 채워 냈다. 당시에는 새로운 학과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결심과 확신으로 가득 차있었는데,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제가 이 학과로 와야 하는 이유는 저의 재능이 이 전공에 맞다는 강력한 확신에 의한 것이요, 더 이상 이 길로의 발걸음을 지체할 수 없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관심 분야는 어쩌구이고 누구 교수님과 이에 대해 더 심층적으로 공부할 계획이 있고, 본격적인 연구자의 길로 갈 마음도 확실합니다….

  3천자의 구구절절함을 요약하자면 그곳에 가 최고의 학생이 될 것이니 나를 뽑아달라는 이야기였다. 이 절절한 서류는 통과가 안 되면 이상할 정도였고 역시나 통과되었다. 몇 주 뒤, 혀에 장착한 3천자의 확신을 면접에서 쏟아내었고 면접관이었던 교수님이 말했다. 학생은 우리 전공을 잘 이해하고 있어서 면접을 볼 필요도 없군요.

  그렇게 최종 결과가 나오기 전부터 나는 이곳의 몸이 되었다. 여름의 끝자락, 고양감은 하늘을 찔렀고 잘 해낼 수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좋은 기분 속에 시간이 흘러 어느덧 9월, 새 학과에서의 첫 학기가 시작되었다.

  한편 주룡은 조합원으로의 삶을 시작한다. 그런 주룡에게 한 남성이 찾아와 말한다. 당신이 이번에 참여하고 있는 운동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고.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한다고. 그 말에 주룡은 노발대발하고 남자를 쫓아낸다. 그는 주룡을 지속적으로 찾아와 함께 더 큰 일을 도모하자고 스카우트 제안을 하고, 마침내 주룡은 받아들인다.

  그를 따라 참여하게 된 단체는, 여성 노동자들이 모인 곳과는 달리 남성-지식인 중심이다. 그들의 여성 노동에 대한 빈약한 이해와 여성에 대한 은근한 무시에 주룡은 자꾸만 기가 죽고 왜 여기에 있을까 싶다. 화가 나서 큰 소리를 내보기도 하지만 반발을 일으킬 뿐이다. 그리고 본인의 행동에 스스로가 가장 괴롭다.

  나의 경우는 주룡이 처한 사회적인 상황보다는 다소 개인적인 문제지만, 그렇게 기가 죽는 상황은 이해가 되었다. 새로운 학과에서의 시작은 기실 가족에게도 응원 받지 못했다. 부모님은 이전 전공에 대한 자부심(당사자도 아니면서!)이 있었다. 최종적으로 전과가 확정되어 어머니께 말씀드렸을 때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되어서 좋니?’라는 말을 하셨으니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호기롭게 전공 수업을 많이 신청했더니 그만큼 새 학과 친구들에게 나를 소개할 일도 많았다. 간단히 학번과 이름만 말하고 넘어가고 싶었지만, 소수과라서 못 보던 사람은 눈에 띄었다. 꽤 고학번인데도 다들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 ‘뉘신지…‘하는 표정이었다. 결국 매번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 공대 xx학과에서 전과했어요.”

  이 말만 하면 대화의 공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헐, 대박. 짧은 감탄사들을 뱉다가 훅 물어왔다.

  “어쩌다…?”

  ‘어‘에서는 나와 눈을 맞추고, ‘쩌’에서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 ‘다‘는 어떤 뉘앙스를 품고 여운 있게 흩어진다. 그 뉘앙스에는 호기심도 있지만 대개는 나의 선택이 뭔가 잘못되고 이상하다는 판단이 포함되어 있다. 도대체 왜 그러신 건가요? 연봉 낮아지는 소리가 들리네요….

  ‘어쩌다’라는 말 자체가 기분 나쁜 건 아니었다. 나조차도 수없이 생각한 부분이니까. 그래서 오래간 고민했던 거니까. 다만 실망스러웠던 부분은,

  “어쩌다보니….”

  -라고 헛헛한 대답을 하고 있는 나였다.

  전과 동기 3천자 중 한 문장이라도 말하면 될 텐데, 왠지 그게 입에서 안 나왔다. 절대 이곳에 ‘어쩌다보니‘ 온 게 아닌데. 분명 절실했는데. 그 뉘앙스를 느끼니까 왠지 이 선택에 대한 의심들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혹시 나 잘못 선택한 건가… 싶었다.

  그 명료했던 마음은 어디로 갔을까…. 이제 막 시작한 사람인데 지나간 청춘에 대한 노랫말 같은 게 자꾸 떠올랐다. 스스로 한심했고 몹시 심란했다.

  주룡은 새로운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되었을까. 기 죽은 주룡을 물 밑에서 건져 올린 것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다른 이들의 인정과 응원, 칭찬이었다. 주룡을 스카우트했던 그 남성은 분에 차있는 주룡에게 말한다. 당신은 아주 큰 사람이라고, 내가 볼 수 없는 것을 본다고. 그는 주룡의 기개와 탁월함에 대해 말하며 주룡을 북돋운다. 그의 말은 독자인 나까지도 용기를 얻을 정도로 좋았다.

  그 후로도 주룡은 수없이 흔들린다. 그러나 그 흔들림보다 일어선 횟수가 더 많았다. 누군가에 의해 넘어진 주룡을 일으켜주는 이 또한 어느 타인이었다.

  실망감과 의심이 겹겹이 쌓여있던 9월 중순의 어느 날이었다. 같은 수업을 듣는 같은 학번의 학우와 계단을 내려가며 서로의 이름을 나누었다. 학번은 같은데 처음 보는 얼굴이니 그가 복수전공생이냐고 물었다. 여느 때처럼 대답했다. 이번에 xx학과에서 전과했어.

  그 역시 예전 학과를 듣더니 놀란 눈치였다. 정말? 신기하다. 그 과에서 온 사람은 처음인 것 같아… 그 말을 들으며, 이제 슬슬 ‘어쩌다‘가 들려올 타이밍인데 무어라 대답을 할까… 막막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말했다.

  “축하해! 전과 성공한 거잖아. 네가 간절히 원했던 거 맞지?”

  잠깐 어리벙벙했다. 다음 순간 가슴이 뻥 뚫렸다. 머리가 확 개운해졌다. 오랜만에 후련하게 답했다. 응, 맞아. 나 진짜 오랫동안 그려왔어…. 전과한 것으로 축하받은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여름의 그 명료했던 결심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입에서 바람처럼 말이 흘러나왔다. 어떤 공부를 하고 싶어서 왔는지, 이 수업은 예전부터 들으려던 과목이었던 것… 말문이 팍 트였다. 숨어 있던 3천자의 포부가 꿈틀대며 열정을 일으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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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룡의 인생이 희망을 주는 든든한 영웅담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가 그의 결심을 끝까지 버텨냈음에 있다. 소설의 처음에는 한 가족의 딸, 누군가의 아내였고 후반에는 단체의 장이 되며 사회적 위치가 바뀐다. 그러나 그 역할의 크고 작음을 떠나 주룡은 항상 떳떳했다. 떳떳하기 위해 익숙한 곳을 떠나야 했다면 기꺼이 떠났고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래서 나 또한 자꾸만 흔들리는 것을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최선을 다해 내린 결심이니, 여기에 대한 응원에 집중하면 된다. 또 앞으로는 나의 결심이 정확히 ‘어쩌하다‘고 명확하게 밝히겠다. 스스로에게 떳떳할 정도로 확실하게, 내가 그 말을 듣고 스스로에게 힘을 받을 수 있도록 말이다.

  가을이 무르익었고, 이제는 ‘어쩌다’들에게 확실하게 말한다. 이 학과로 ‘어쩌다보니’ 여기에 있는 게 아니라 나는,

 “여기에서 진심으로 공부하고 싶어서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