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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우리 곁의 사람을 언제부터 알게 되었을까?

  우리는 매일 수많은 사람과 스친다. 이들 중 몇 명과 눈을 맞추기 시작하는 때는 언제일까. 그 계기는 무엇이며, 그 많은 사람 중 왜 하필 알게 되었을까.

  최근에 본 한 영상(Life and Death: A Cosmic Perspective from Neil deGrasse Tyson)에서는 내가 현재의 내 모습으로 태어날 수 있는 확률이 0.0000000000001%라고 했다. 이 모습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엄청난 확률을 뚫은 기적적인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제각각 독특하며, 힘겹게 태어난 세계에서의 삶을 즐겨보라는 영상이었다. 극악의 확률을 뚫고 세상에 존재하게 된 사람들이 서로 만날 확률은 얼마나 더 극심하게 낮을까. 학창 시절 한 선생님은 새 학기 첫날 이렇게 물었다. “확률이 얼마나 될 것 같니?” 어리둥절한 학생들의 얼굴을 보며 선생님은 말을 덧붙였다. “이 넓은 지구에서, 같은 나라에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도시의 고등학교로 진학해, 같은 반이 될 확률 말이야. 그건 정말 작을 거야. 그러니 이 기적 같은 관계를 소중히 여기거라.”

  내 곁의 사람들과 웃고 떠들다가 종종 선생님이 말한 확률을 생각한다. 불가능에 가까운 확률로 만들어진 이 인간관계, 그 시작은 무엇일까? 어쩌면 스쳐지나가던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할지도 모른다. 가물가물하던 이름을 기억해내고, 마스크 위의 두 눈을 알아보며, 왼쪽 볼에 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 사소한 버릇과 자주 입는 옷 스타일이 눈에 익다 보면, 곧이어 취향 등 내면과 관련된 특징을 알게 된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상대의 마음속으로 깊게 잠수할 수 있다면 다른 세계를 보기도 한다. 푸르게 넘실거리는 눈물이라든지, 빛이 닿지 않는 암흑 속 살아 있는 상처라든지, 온몸을 휘감는 차가운 온도라든지. 서로에게 깊게 잠수 후, 미끌미끌해진 피부를 닦고 담요를 덮어주다 보면, 추위에 떨리는 몸을 안아주는 시간이 온다. 이를테면 속상한 일을 겪고 같이 마시는 술, 새벽에 길게 이어지는 통화와 같은. 즐거움과 더불어 슬픔을 공유하다 보면 타인은 자연스럽게 내 삶의 한 부분이 되어 간다.

  이러한 인간관계가 주는 행복은 분명 있다. 고개를 젖히며 웃고 이야기하다 보면 근본적인 외로움은 잠시라도 잊힌다. 힘든 일이 있을 땐 말을 털어놓고 다독임을 받을 수도 있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나와는 다른 세계를 엿보며 시야가 확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인간관계가 주는 즐거움과 비례해 몸을 불리는 감정이 있다. 관계의 끝에 대한 두려움이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시작이 있는 일에는 끝이 있는 법이므로. 뛰기 시작한 심장이 언젠간 멈추는 것처럼, 관계의 종말은 자연스러울 것이다.

  새로운 사람을 알아가는 게 마냥 좋았던 20대 초반을 지나, 관계의 끝이 두려워지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삶을 살며 수많은 인간관계가 시작된다. 대부분 카카오톡의 친구 목록과 인스타그램의 팔로워 목록에 작은 흔적으로 남는다. 소수의 관계는 훨씬 더 복잡한 모양을 갖는다. 정확히 자를 수 없는 관계들. 많은 줄로 정교하게 연결되어있어 나와 상대를 분리해내는 것이 어려운, 상대와 관련된 것을 전부 도려낸다면 나 역시 너덜너덜해질 그런 관계들도 있다. 이러한 관계의 끝을 몇 번 겪은 후로 깊숙한 관계의 시작이 두려워졌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결국 끝이 나고, 그 끝은 눈가를 무겁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성적으로 끝을 고했다면 좀 나았을까. 서로에게 다정했던 때가 분명 있었는데 때론 얼굴을 붉히고, 울고, 소리 지르고, 구질구질하게 욕을 하며 원수처럼 관계가 끝이 나기도 한다. 혹은 그럴 힘조차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피곤해 침묵 속에 멀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관계가 끝이 난 후엔 회의감이 들었다. 어차피 끝이 날 거라면 왜 시작할까 싶은 마음에 사람들과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는 것을 피하기도 했다.

  최근에 겪은 사건 역시 관계의 끝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 공포를 느끼게 했다. 각별하게 친하다고 생각한 친구로부터 소위 손절을 당한 일이었다. 친구로부터 일방적인 장문의 메시지를 받은 후, ‘카카오톡과 인스타그램 차단’, ‘블로그 서로이웃 끊기’라는 매우 현대적인 방식으로 관계가 단절되었다.

  그 친구와 나는 절친한 사이였다. 성인이 되고 난 후, 중고등학생 시절에 친했던 많은 친구와 서먹해졌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서로 경험하는 게 다르다 보니 그때만큼 공감하며 관계를 이어나가기 어려웠다. 친구와 나는 이 어려움 속에서도 우정이 유지되고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고등학생 시절보다 다차원적으로 변한 고민을 털어놓으며 신뢰가 단단해지고 서로가 더 소중해졌었다. ‘할머니가 되어도 우리는 친하지 않을까.’, ‘나중에 옆집 살자’와 같은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무슨 이야기든 할 수 있었고 가족도 모르는 나의 면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 친구와의 우정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이유로 갑작스럽게 끝이 났다. 그 후 다른 사람들 역시 갑자기 떠나 갈까봐 한동안 몹시 두려웠다. 곁에 있는 사람들의 웃음을 의심하고 마음을 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몇 년 동안 쌓아온 관계 역시 한순간에 끊길 수 있다는 걸 안 순간 모든 게 허망해졌다.

  그러나 어떤 사건을 계기로 관계의 시작에 대해 조금 더 용기를 내게 되었다. 예전과 다른 연애의 영향이었다. 인간관계의 한 유형인 연애는 장점과 더불어 만만치 않은 단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연애를 시작하고 서로 맞춰가며 곁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지만 결국 이별을 겪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예전에는 시작 전부터 끝에 대한 생각이 불쑥 고개를 들곤 했다. 결국 끝날 관계인데, 남보다도 못할 사이가 될 수 있는데, 왜 시작하나 싶었다.

  심지어 나이가 들수록 연애의 시작 자체가 다른 의미에서 더 어려워졌다. 연애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너머, 이를테면 몹시 부담스러운 결혼의 가능성을 점치며 연애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아직 결혼에 대한 생각이 조금도 없는 나는 시작이 꺼려졌다. 상대가 나의 결혼관을 알고 꺼리거나 결혼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자 나를 설득하기도 했다. 이러한 의견 차이는 곧 관계의 끝으로 나를 떠밀었다.

  내게 영향을 준 지금껏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그 연애는, 시작할 때부터 그 끝이 꽤 선명하게 정해져 있는 연애였다. 그는 일 년 후 한국을 떠날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가볍게 그를 만나는 거냐고 질문했다. 그렇진 않았다. 시작단계였으니 소위 롱디 커플이 되어 고난을 극복하고 말 거라는 결단이나, 우린 보통의 커플들과 다르다는 확신은 없긴 했다. 아마 그 전에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되거나 현실적으로 이별을 맞지 않을까 싶었다. 우리는 이미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습한 여름날 서로를 알게 된 후, 어느 날 그가 내게 중요한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그는 그의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국에 최대한 머물 생각이었으나 혹시 모를 경우 나를 슬프게 만들고 싶지 않다고 덧붙였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현재에 집중해보자. 일 년 후 상황이 바뀔지도 모르는데 섣불리 단정 짓고 싶지 않았다. 사실 이런 합리적인 이유보다는, 그와 함께 보내는 현재가 대책 없이 좋았던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