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그를 추억하기 때문이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아니다. 상대방한테는 이미 정이 떨어질 대로 다 떨어진 상태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목도리를 버리고 싶지 않았다. 전 여자친구는 별로였지만 몇 번 쓰지 않은 목도리는 무슨 죄인가.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 촌스러운 초록색 목도리였지만 제 기능을 하는 물건을 버리면 왠지 내가 환경오염에도 일조하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
미래의 애인이 들으면 기겁할 일이다. 아무리 아깝다지만 명품도 아닌 그깟 목도리를 애지중지 보관하고 있다니. 그래서 사실 종종 고민하기도 한다. 아깝다는 감정은 제쳐두고 정리할 건 확실히 정리하는 게 미래에 나를 만날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되지 않을까. 하지만…… 너무 아깝다! 나와 이미 관계가 끝난 사람들이 선물로 준 목도리, 다이어리, 캐릭터 피규어 등등……. 모두 쓸모가 있는 것들이라 버리기는 아깝다. 혹자는 나더러 정리 좀 하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무언가를 버릴 때마다 그 물건의 수많은 용도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
꼭 버려야만 할까.
이미 관계가 끝난 사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쓸모가 다할 때까지 쓰면 안 되는 걸까.
-이런 고민을 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전자담배를 피우는 친구와 담배를 피울 일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전자담배를 피우게 된 계기가 전 여자친구 때문이라고 했다. 예전에는 연초를 피웠는데 전자담배를 피우는 전 여자친구와 흡연 속도를 맞추기 위해 전자담배를 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그 사람과는 헤어졌지만 이미 전자담배에 정착했기 때문에 굳이 다시 연초로 돌아갈 필요는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그렇다. 전자담배 초기비용은 5만원이었다……. 5만원이면 치킨이 두 마리, 점심 식사가 다섯 번, 커피가 열 잔이다! 게다가 전자담배를 한 번 사면 기계가 망가질 때까지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그런 걸 버릴 수는 없었다. 담배를 다 피우는 동안 우리는 아무리 관계가 끝난 사람과 관련된 물건이라지만 다 쓰지도 않은 물건을 버리는 게 얼마나 아까운 일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
아무리 사람을 속상하게 만드는 추억이 깃들어 있다고 하더라도 물건을 버리는 일은 어려운 것 같다. 예전에 한 친구에게 만년필을 선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에게 차단을 당했다. 내가 워낙 호불호가 심한 사람이고 그 친구도 고집이 센 사람이었는데 서로 가치관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고등학생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친구인데 나한테 아무 말도 없이 연락을 끊어 버렸다. 차라리 말이라도 하면 고칠 수 있는 건 고쳤을 텐데 우리 관계가 고작 그거밖에 되지 않았던 건가? 속상한 기분밖에 들지 않았다. 그 친구가 선물해 준 각인 만년필을 보면 좋았던 시절이 떠올라 가슴 한구석이 먹먹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가 선물해 준 만년필을 쓰고 있다. 분홍색 잉크가 들어간 4만원짜리 라미 사파리. 아직 몇 만 자나 글씨를 더 쓸 수 있는 만년필을 버릴 수는 없었다.
정리해야 하는 건 심란한 내 마음이지 멀쩡하고 죄도 없는 만년필이 아니다. 지금 당장은 만년필에 새겨진 각인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겠지만, 시간이 약이라는 말처럼 몇 달 후에는 그 각인을 보아도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추억은 휘발성이지만 물건은 남으니까. 물건에 대한 추억이 휘발되는 날이 오리라고 믿는다.
그렇게 그 친구에 대한 아쉬운 마음을 꾹꾹 눌러 담으며, 나는 다시 만년필에 잉크를 채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