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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봐라, 정리 안 하나. 물건 좀 갖다 버리고. 얼른 일어나서 치워. 빨리!!”
귀에 딱지가 자리 잡기 직전, 느적느적 침대를 깨고 나온다. 아무리 봐도 내 책상, 부끄러운 점 하나 없는데?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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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가장 싫었던 시간이 집 대청소, 그중에서도 ‘창고정리’를 하는 시간이었다. 쌓여있던 물건을 와르르 쏟아 내어 아직 쓸 만한 건 다시 창고에, 그렇지 않은 건 쓰레기 상자에 모아두는 일. 도대체 불필요한 물건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내 눈엔 하나하나가 다 소중했다. 물론 당장 쓰는 것들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예외가 있다면 교과서와 문제집 버릴 때. 그땐 행복했다. 너와는 좋은 인연이 아니었다는 듯 쓰레기 상자에 아주 그냥 딱지치기를 했다!)
엄마의 입김에 못 이겨 하나하나 쓰레기 상자에 담을 때면 이 친구와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도저히 쓰레기 상자로 손이 가질 않았다.
이건 내 절친이 생일 때 준거라 아낀다고 뜯지도 못한 스티컨데, 너무 아꼈다가 그사이에 취향이 변해버리고 말았다. 이건 영어 학원 친구가 사준 커플 볼펜. 초승달과 보름달이 서로 뽀뽀하고 있는 모양이라 지금 사용하기에 조금 남사스럽다. 이건 아는 동생이 생일선물로 사준 필통, 저건 합창대회에 나가서 탄 상품, 친구가 해외여행 갔다가 반에 돌린 기념품, 모두가 나를 위해 모아준 연애 혁명 껌 종이…!
지금 쓰기엔 정말 필요도 없고 자리만 차지하는 아이들이지만 나의 추억과 친구들의 정과 사랑이 담겼다. 그것만으로 존재가치가 있지 않나요…? 엄마는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쓰레기 상자를 가리킨다.
창고 속 잡동사니의 절반이 떠나갔다.
😥 😥 😥
추억이 담긴 물건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나의 습성은 인간관계에서도 보인다. 나는 끊어내질 못한다. 일명 ‘손절’이라는 것이 없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의 소중한 만남 중 과거형은 없다. 거리가 멀어지거나 접점이 이전보다 줄어 서서히 멀어진 것을 제외하곤, 악감정으로 끝난 관계가 없다.
너무 유하게 지내서 친구들과의 다툼이 없었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다. 싸움도 겪었다. 심하게 싸워서 반 친구들 모두가 주목할 때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메신저 앱을 통해 서로 열심히 말다툼도 했고, SNS에서 티를 내길래 화나고 상처받기도 했다. 학교 복도 캐비닛 앞에서 울고불고 싸우기도 했다. 그래도 그것뿐, 손절 직전까지 가도 절대 관계를 끝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항상 그렇다. 누가 잘못을 했든, 결국 그 사람과 관계가 멀어지고 나면 내게 남는 것은 분노 대신 냉정한 이성이다. 지금의 싸움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가치 없는지를 깨닫는다. 심하게 싸웠을 정도면 보통 정말 친했던 친구일 경우가 다반사였는데, 그렇다면 그 친구가 원래 어떤 사람인지 정도는 안다. 상황이 잠깐 안 좋았을 뿐,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순간의 감정과 잘못 세운 자존심, 나중엔 생각도 나지 않을 유치한 상황으로 인해 좋은 사람을 잃고, 그 사람과의 추억을 잃고, 그 추억 속의 나도 잃어야 하나. 나는 그러지 못한다.
사람은 잘못 없다. 상황이 문제였다. 그 친구도, 친구와의 추억도, 그 추억 속의 내 모습도 못 놓겠고, 행복했던 추억을 앞으로 떠올리기 찜찜해야 하는 것도 싫다. 서로가 싫어서 싸운 게 아니라 상황이 좋지 않았던 것이니 충분히 같이 해결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우린 소리 지르며 심하게 다툰 복도 캐비넷 앞에서 눈물 콧물 함께 흘리며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다. 결국 그렇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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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을 함께 보낸 친구가 있다. 같은 중학교, 같은 고등학교를 보내며 꽤 가까이 지내왔고 많은 시간과 추억을 공유했다.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우리의 삶은 겹쳐있었다. 수능을 준비하며 함께 의지하고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를 응원하며 꿈을 키워갔다.
하지만 수능이 점점 가까워지자 각자 예민해 있었던 탓인지, 우리는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6년의 세월을 단칼에 등져버렸고 신경이 쓰였지만 제 코가 석 자라 당장의 관계보다 공부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점점 사이는 틀어지고 관계는 곪아갔다.
중요했던 시험이 끝났지만 우린 서로를 피했다. 하지만 싸웠다고 영영 마주치지 않을 순 없었다. 수능이 끝나면 함께 하기로 약속하며 미리 구매해둔 것, 예약해둔 것 이것저것 많았다. 과거 우리의 우정이 미래에 틀어질 관계를 예측이라도 한 걸까. 덕분에 우린 접점을 외면하지 못한 채 다시 만남의 물꼬를 틀 수밖에 없었다.
깊고 날카로운 상처를 주고받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인연인 것을 알기 때문에 엉킨 실타래는 다시금 풀렸다. 추운 겨울 저녁 10시, 우리는 자주 산책하던 공원에서 만나 어색하고 화내고 울고 웃다 결국 또 다른 만남을 기약하고 새벽 2시 헤어졌다.
물론 다시 화해했지만, 바로 예전만큼의 사이로 돌아가지 못할 때도 있다. 화해하기 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거나 서로 크게 상처를 주어 아직 아물지 않았거나, 예전처럼 대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때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 자신의 모습을 이성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면 서로 실수를 인정하고 손을 내민다. 이전과 달리 약해진 관계에 그래도 부정적인 감정은 남지 않았다.
또는… 내가 붙잡는다. 내가 잘못을 했든, 상대방이 잘못을 했든 간에. 나는 여태껏 그래왔다. 위와 같은 이유로 말이다. 아직은 잠깐의 상황과 자존심보단 친구와의 추억과 관계가 더 중요하다. 이런 내가 미련 많고 구질구질해 보이는가?
이런 나의 부분을 나쁘게 생각하진 않는다. 가끔 친구와 어울리며 열심히 싸웠던 과거를 떠올리면, 이렇게 좋은 친구를, 관계를 순간의 감정과 알량한 자존심으로 잃었으면 어쩔 뻔했나- 생각하곤 한다. 나는 정이 많고 사람이 좋으며 ‘우정’이란 관계를 끔찍이도 사랑한다.
가끔은 이렇게 정도, 미련도 많다가 크게 한 번 데이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을 하기도 한다. 한번 심한 상처를 입으면 정 많은 내가 못 헤어 나올 게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어려서, 학창 시절을 막 졸업해서, 좋은 인연으로만 곁을 채워서, 내게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을 즐기려고. 아직 관계에 희망이 있고, 정이 있고, 사랑이 있을 때 집중하려 한다.
진심을 담아서,
매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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