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말에 큰 힘이 있다고들 한다. 어렸을 적엔 공감이 가지 않았다. 어떻게 고작 말 한마디가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고집 센 독불장군처럼 혼자 우뚝 서서, 나에게 날아오는 불행들을 묵묵히 다 맞아버리는 편이었다. 그 어떤 위로나 조언도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아주 꽉 막힌 아이였다. SNS에 올라오는 응원 글귀, ‘~라도 괜찮아’라는 식의 제목을 가진 책들, 내겐 그저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상품이고 홍보를 위한 텅 빈 말들이었다. 그러나 내 가치관을 바꿔준 건 그 어떤 엄청난 해결책도 도움도 아닌 ‘말’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나는 나를 가둘 우물을 끊임없이 팠다. 평소라면 가볍게 지나갈 일들도 마음의 여유가 없던 내겐 과대해석 되었다. 그다음의 실패를 암시하는 불행의 클로버로 느껴졌다. 당시 나를 가둔 n번째 우물도 그저 ‘원하던 동아리 면접에 붙지 못했다.’라는 사소한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수십 명 중에 단 두 명을 뽑았고 2차까지 갔으니 그렇게 좌절할 필요는 없었다.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는 것에 만족하고 다음 단계에 도전하면 되었을 텐데 왜 그리 아쉬워했는지. 그땐 원하던 것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이 마냥 슬펐다. 학교 내신 활동과 관련된 일이기도 했고, 단순히 동아리의 문제가 아니라 내 한계는 여기까지라고 후벼 파는 느낌이었다. ‘지금은 동아리지만 다음번엔 대학일지 몰라.’라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했다. 계속될 실패가 두려웠다. 그 시절의 나는 지나치게 비관적이었다.
선발 결과를 듣고 표정 관리를 못했는지 친구가 다가와 물었다. 평소처럼 혼자 삼키려다 그날따라 무슨 이유에선지 그냥 털어놓았다. 친구는 내 깊은 한탄을 듣더니 영어 지문을 공부하다 읽었다며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어느 대학 교수가 유리컵에 물을 따르고 무게를 물었다. 학생들의 입에선 백 그램, 이백 그램 등 다양한 답이 나왔다. 다음엔 물컵을 오래 들고 있으면 어떻게 될지 물었다. 1시간이면 팔이 저리고, 종일 들고 있으면 근육이 마비되고 경련이 올 것이라는 대답이 오갔다. 교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팔이 아프겠지만, 그 과정에서 컵의 무게엔 변화가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팔과 근육을 아프게 한 것은 컵 속 물의 무게가 아니라 자신이 물컵을 얼마나 오래 들고 있는지에 달렸다는 것이다. 교수는 삶의 문제에 관해서도 이와 같다며, 오래 붙들고 고민하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교훈을 전했다.
친구는 이야기에 덧붙여, “어차피 바꿀 수 없는 과거라면 이제 그만 물컵을 내려놓고 다음도 있으니까 기운 내.”라고 조언해주었다.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힘든 만큼 물컵 속에 물이 가득한 줄 알았다. 그러나 나를 힘들게 한 것은 물의 양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 그냥 내가 물컵을 오래 들고 있었을 뿐이었다. 오래 들고 있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나는 물컵을 내려놓기로 했다. 그날 이후론, 힘든 일과 다시 마주해도 마음에 곰팡이가 필 때까지 붙들지 않는다. 한때 내겐 깊은 바닷속이었던 슬픔이 사실은 그저 무릎까지 오는 얕은 수영장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별것 아닌 일에 나를 옭아매고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지 않을 것이다. 어떤 말뿐인 위로도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으니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지난날을 반성한다. 친구의 조언이 나를 동아리에 다시 붙여준 것은 아니다. 대신 끝난 일을 받아들이게 해 주었다. 좌절에 그치기보다 실패를 통한 성장에 집중하게 해 주었다. 앞으로 만나게 될 고난도 현명하게 대처할 힘을 주었다. 삶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나서야 나는 조금씩 변화했다. 우물 안의 개구리. 꼭 나를 위한 속담이다. 내가 팠던 깊은 우물에 누군가 두레박을 내려주었다. 밖으로 나와 마주한 세상은 우물 안에서 보았던 모습과 천지 차이였다. 이젠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마다 물컵 이야기를 떠올린다. 내가 혹여 한 모금 거리의 물이 담긴 컵을 오랜 시간 붙들고 있는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