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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교롭게도 내가 사랑을 시작했던 계절은 늘 여름이었다. 여름을 생각하면 그 해 여름 내가 빠져있었던 사람들이 떠오르고 그 사람들을 떠올리면 여름이 생각난다. 17살 이후로는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고 보낸 여름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이쯤 되면 여름 기후가 어떤 감정이랄지 호르몬이랄지를 생성하는 게 분명하다. 꼭 열이 아니더라도 뭔가를 방출해야만 하는 계절인 건 맞을 것이다. 특히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인간의 생애 주기 중 가장 에너제틱한, 뭔가 큰일이라도 일어날 듯 불안하게 끓어대는 열기를 견딜 수 없는 나이에는.

 첫사랑이 시작된 정확한 시점은 기억나지 않는다. 사랑의 계기를 대보라고 해도 댈 수가 없다. 여러 사건이며 감정들이 순서 없이 마구 뒤섞여있기 때문이다. 확실한 건 내가 미친 듯이 많이 걸었던 기억이다. 학교에서 우리 집까지, 다시 우리 집에서 그 애 집까지, 우리 집도 그 애 집도 지나지 않는 길을 시작부터 끝까지. 여름 저녁은 알다시피 산책하기에 너무 좋다. 봄과 가을의 무난한 기온도 따라올 수 없는 온도, 습도, 바람의 완벽한 조화가 여름 저녁에는 있다. 날씨가 이렇게나 좋으니 반드시 걸어야 된다는 구실로 밤 산책 데이트(이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다)를 실컷 즐겼던 기억이 무수히 많다. 얼마나 많이 걸어댔으면. 그 아이와 내 낭만은 그렇게 끝도 없이 걸었던 장면만이 전부다. 첫사랑은 안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어서 차라리 다행일지, 내 첫사랑 역시 지독한 짝사랑이었다.

 짝사랑이라고 하면 가슴 찢어지는 안타깝고 씁쓸한 사연을 상상하던데 이는 짝사랑의 묘미를 몰라서 하는 말씀이다. 내 짝사랑은 생각보다 즐거웠다고 기억된다. 사실 끝장을 본 적 없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덕질의 경험이 있는 분들은 공감할 것이다. 내 감정을 샘솟게 하고 그 에너지를 쏟을 대상이 있다는 것만으로 삶은 활기차진다. 게다가 그 덕질 대상과 가까이에서 교류할 수 있다면?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 부여하고 긴장하고 설레하는 일들은 인간이 느끼는 쾌감 탑 10에는 들 만큼 짜릿하다. 고백할 생각 추호도 없는 짝사랑은 이렇게나 달콤한 것이다. 애초에 끝을 정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내 사랑의 끄트머리가 어땠는지 같은 건 전혀 기억나지도 궁금하지도 않다. 내게 남은 건 운좋게도 사랑의 풋풋한 초입뿐이다.

 일반적으로 여름 대표곡이라고 하면 휴가를 떠날 때 차에서 시끄럽게 틀어두는 노래들을 떠올리지만 난 그런 노래들은 왠지 피하게 된다. 묘하게 가짜 여름이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여름 플레이리스트는 이런 것들이다. Rain drop, 여우야, 지난날, 수채화... 대체로 여름비, 그중에서도 우중충한 장마가 아닌 산뜻한 여름 부슬비 느낌. 내가 이렇게 여름비를 좋아했던가? 여름의 상징을 비로 삼을 정도면 어지간히 비를 좋아하는 사람인가 본데, 이렇게 생각하겠지만 전혀 아니다. 여름비는 사실 짜증 나는 점이 한두 개가 아니다. 옷은 젖고 신발에서는 냄새나고 머리는 구불구불 난리 나고 장마철에는 빨래하기도 힘들다. 우산을 써도 옷이 푹푹 젖을 만큼 비가 쏟아지면 오늘이 정말 역대급이었다며 날씨 욕을 그렇게 한다.

 그런데 웃기다. 여름은 항상 더웠는데, 분명 오늘 너무 더웠다고 쓴 기록은 천진데 막상 여름을 떠올리면 더웠던 기억은 다 증발하고 시원하게 비 내리던 기억만 남아있는 것이다. 그것도 예쁘게 미화된 모양으로. 아늑한 공간에서 듣는 간지러운 빗소리만, 폭우 속에서 온몸을 적시고도 요란하게 터질 수 있었던 웃음만. 내 여름의 기억을 불쾌한 땀과 습함이 아닌 기분 좋게 촉촉이 내리는 비로 바꿔놓은 것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무엇일까.

 비가 온다.

 네게 말할 게 생겨서 기뻐.

 비가 온다구!

 나의 소중한 이여.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 황인숙,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지금은 좋게만 추억하는 옛사랑도 정말로 늘 좋지만은 않았다. 오락가락 역동적이었던 그 시기엔 걔 한마디에 기분이 곤두박질치기도 했겠고 내가 한 행동이 부끄러워서 안 그래도 짧은 밤에 잠 못 이루던 날들도 많았겠지. 그맘때 쓰던 수첩 같은 일기장에 그 애에게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아픔을 구구절절 눈물 묻혀가며 적어둔 걸 보면 당혹스러워지기까지 한다. 그랬던 과거를 싸그리 잊었다면 거짓말이다. 그렇지만 여름을 떠올리면 신기하게도 눈물과 땀의 감정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온통 비가 영화처럼 쏟아지는 배경만이 있다. 덕분에 나는 여름을 생각하면 너랑 걸었던 순간들이 비 내리는 날처럼 나타나. 그때 들었던 노래들을 올해 여름에도 들어. 내가 여름을 사랑할 구석을 만들어줘서 고마워. 철저한 짝사랑을 위해서라면 이런 말들도 아마 평생 전하지 않을 예정이지만 말이다.

 여름이었다.

 나는 여름이면 지금은 끝나버린 과거의 청춘과 낭만을 대표하는 MBC의 대학가요제 내지는 강변가요제 노래들을 찾아 듣는다. 두 가요제는 끝나버렸다는 것이 아쉬운 동시에 지금은 없다는 사실이, 나는 살아보지도 못했던 과거의 추억을 되살려준다. 너무나도 유명한 익스의 안녕하세요 이상은의 담다디 같은 노래들을 당시의 축제 현장을 담은 비디오와 함께 감상하는 것도, 혹은

 노래만 들으며 다른 일을 하는 것 모두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살아보지 못한 과거를 추억한다는 것은, 타자의 젊음을 나의 젊음으로 가져온다는 편법과 같은 감성 도둑질을 이토록 즐거워하는 것은 비단 나뿐이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그 대표 격으로 방영을 시작하면 관심을 가지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인기를 끄는 드라마인 응답하라 시리즈가 떠오른다. 시리즈의 첫 작품인 <응답하라 1997>부터 <응답하라 1994>를 거쳐 <응답하라 1988>까지 매 시리즈가 이러한 짓궂은 감성을 자극한다. 응답하라 시리즈가 이토록 대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특히 젊은층에도 잘 먹힐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시절의 문화가 가진 아름다움이 이미 과거에 입증된 것이라는 사실과 동시에 과거임에도 그것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 자들에게는 새롭게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응답하라 시리즈 같은 복고 장르가 젊은 층에게 즐거움을 주는 이유는 또 있다. 응답하라 1988이 방영하던 시기, 지금은 독립했지만 내가 아직 가족들과 살고 있을 때, 거실에서 시간을 맞추어 TV를 틀어놓고 방송을 기다리던 설렘 그리고 엄마와 함께 바닥에 깔린 이불 위에서 엎드려 방송을 보던 기억이 좋은 추억으로 떠오른다. 사실 방송 자체의 내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는 기억나지는 않는다. 본지 오래되기도 했고 내용상 엄청난 스토리 라인이 있는 작품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억나는 인상적인 장면들이 몇 있다. 극 중 수학여행 에피소드라든지 다 같이 바다에 가는 장면, 어른들 몰래 술을 마시고 즐겁게 어울리는 장면 등... 수학여행 씬에서 여학교 장기자랑에 깜짝 등장한 동룡이, 선우, 정환이가 부른 소방차의 어젯밤이야기를 난 아직도 엄마와 TV를 보던 그 기억을 추억하고 싶을 때 듣는다. 그리고 나는 이때 방송을 보며 나중에 나도 나의 친구들과 함께 이런 낭만을 즐기고픈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때의 소망과 감상을 되새기는 것이 또 다른 기억과 즐거움이 되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추억거리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응답하라 시리즈의 제작진도 이를 모르지 않는 듯하다.

 "뜨겁고 순수했던,

 그래서 시리도록 그리운 그 시절.

 들리는가, 들린다면 응답하라.

 나의 젊은 날이여."

 응답하라 시리즈의 마지막 나레이션, 나의 젊은 날의 기억이 돼준 응답하라 시리즈를 사랑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어주는 대사이다. 후에 되새기며 추억할 수 있도록 젊은 날을 살아갈 용기를, 의지를, 낭만을 제공한다. 내가 충분히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나이가 되어 나도 외쳐보고 싶다. '응답하라 나의 젊은 날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