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노랗게 썩었던 이파리가 떨어지고 새로 파릇파릇한 잎이 났다. 순애는 내가 옆에 얼쩡거릴 때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다. 전처럼 흙에 하얀 무언가가 생겨나지도 않았다. 보들보들 예쁘던 작은 꽃들은 사라졌지만 이제 완전한 연두색 풀이 된 순애는 더 싱그럽고 예뻤다.
반려 다육이를 키우는 것은 쏟아지는 애정과 관심이 아니다. 적당한 거리와 미지근한 관심이다. 나처럼 식물에 대해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이 순애 옆에 붙어서 내가 해주고 싶은 걸 마음대로 했던 건 분명히 순애를 괴롭히는 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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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식물이 아니더라도, 모든 반려 생물과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우리 가족만 해도 너무 붙어있으면 꼭 싸움이 나곤 했다. 적당히 서로 바빠 멀어질 때 가장 사이가 좋다. 집에 종일 붙어있으면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는 우리 자매도 한 명이 다른 지역으로 떠나고 나면 본가에서 볼 때마다 그렇게 애틋할 수가 없다.
두 생물이 같이 살아간다는 건 한 공간에 나란히 있겠다는 거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과 하나가 되고 싶다는 말은 그렇게 생각처럼 조화롭고 아름다운 하나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상대방과 나를 동일시해서 내가 그의 일부가 될 수 있도록 나를 조작하거나, 그를 내 일부로 종속시키려고 하는 애정의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순애를 데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나의 과몰입은 순애를 나에게로 종속시키려는 것에 가까웠을 것이다. 내가 덥다고 순애를 그늘에 집어넣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적당히 미지근한 관심이란 건 뜨거운 관심보다도 어렵다. 왜 사람들이 요리를 할 때 약불로 10분 데워야 하는 것을 강불로 1분 데우고 태워먹는지를 생각하면 된다.
순애와 잘 반려할 수 있기 위해서는 순애의 흙이 아무리 메말라 보여도 한꺼번에 많은 양을 주면 안 된다. 그동안 물을 깜박한 게 미안해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듬뿍 주는 것도 안 된다. 또 너무 자주 순애를 관찰하는 것도 안 된다. 작은 변화에도 쉽게 걱정이 들어 물을 주든지 위치를 옮기든지 하여튼 순애에게 피해가 갈 짓을 자꾸 하게 된다.
하지만 그만큼 꾸준히 잊지 않고 순애를 찾는 것도 중요하다. 아예 순애를 방치하고 살다 보면 순애가 정말로 필요하고 원한다고 온몸으로 외치는 것도 발견하기 어려워진다. 가령 화분이 너무 작다거나. 흙에 해충이 살고 있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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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애가 우리 집에 들어와 산 지 214일이 지났다. 그동안 나와 순애의 거리는 한껏 가까워졌다가 엄청나게 멀어졌다가 지금은 적당히 멀고도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내가 없이도 혼자 잘 살 수 있던 순애를 굳이 우리 집으로 데려온 건 나였으니, 나는 순애가 우리 집 반려 식물로 사는 것에 만족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누구보다 순수한 사랑을 품고 있는 작고 강한 카랑코에. 나는 이 카랑코에의 훌륭한 반려 인간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미지근한 온도를 유지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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