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와 함께 사는 일은 이처럼 밋밋하다. 이런 밋밋함 속에 짖지도 울지도 않는 거북이는 조용히,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성장한다. 어항을 더 넓힌다면 북이는 더 크게, 커다란 쟁반만하게도 자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어항의 크기를 넓히면 그에 들어가는 물의 양도 늘어난다. 지금의 어항 크기도 성인 여성이 물을 갈아주려면 온 힘을 다해야하기에 더 큰 어항을 마련하는 것은 무리다. 북이는 그래서 지금 성장이 더디다. 그렇다면 이제 북이에게 남은 건 늙는 일 뿐일까.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사실 사람이라고 다를 것 없다. 물리적인 공간의 크기는 중요하다. 소도시보다 대도시에서 더 다양한 경험을 쉽게 할 수 있는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경우, 자신의 심리적 공간을 스스로 확장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어디에 살든, 방 안의 침대에만 누워 있는다면 큰 변화는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침대에 누워 움직이지 않는 시간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우리는 지금 경쟁이 극심한 사회에 살고 있다. 계속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각종 객관적인 결과로 입증해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해야한다. 때론 무엇을 위해 그렇게 바쁘게 사는 지도 모른 채 성취와 분주함이 주는 뿌듯함에 매혹되어 ‘갓생’을 살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붙이기도 한다. 그런데 진정 단단해지려면 가만히 있는 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 마치 북이처럼.
거북이를 키워보면 안다. 거북이는 늘 헤엄만 치지 않는다. 거북이를 기르는 데 있어서 밥과 깨끗한 물, 그리고 헤엄칠 수 있는 넓은 공간만큼 중요한 것은 육지이다. 북이는 헤엄치던 걸 멈추고 육지 위에 올라가 햇빛 아래 가만히 있는다. 두 뒷다리를 편안하게 뻗고 껍질을 말린다. 그저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여도, 마냥 게을러보여도, 사실은 몸을 보호하는 껍질을 더 단단히 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이 없으면 껍질은 물렁해지고 거북이는 병을 앓는다. 살기 위해선 헤엄치던 것을 멈추고, 햇빛 아래 가만히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북이의 모습은 바로 그 일광욕하는 모습이다. 삶을 지탱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만 같다. 아무리 바빠도, 앞을 위해 정신없이 달려도, 잠시는 그 속도를 늦추고 쉬어야 하는 것이다. 침대 위에 누워 몸을 늘어뜨린 채 뒹굴거리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나를 위해 구입한 달콤한 디저트를 오물거리고, 아름다운 노래를 들으며 눈을 감는 시간을 마련해야 한다. 나를 보호하는 껍질을 단단히 만드는 시간은 필수적이다.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고요한 노력이다.
이 노력을 알려준 나의 흐릿하고도 분명한 반려. 나를 반겨주지도, 직접적인 위로를 건네주지도 않지만, 한 집에서 함께 숨쉬며 분명하게 헤엄치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면 밥을 달라고 물장구친다. 밥을 주고 나도 밥을 먹는다. 아무리 우울한 날이라도, 결국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니 먹고 씹고 넘겨본다. 밥을 다 먹고 나면 북이는 어느새 물 속에서 몸을 붕 띄운 채 눈을 감고 잔다. 나도 침대에 몸을 뉘이고, 그렇게 북이와 함께 많은 날을 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