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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내 생활기록부를 한꺼번에 보게 된다면 희망 진로에 일관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화가, 만화가, 피아니스트, 교사, 유치원 교사, 의사, 공무원, 사회복지사, 심리상담가, 카지노 딜러.... 계열과 적성을 넘나드는 이 직업들은 내가 한번쯤 장래희망란에 적은 직업들이다. 이중에 내가 진심으로 되고 싶었던 건? 음... 거의 하나도 없었다고 볼 수 있겠다.
나는 어린 시절 내내 이렇다 할 꿈이 없었고, 그래서인지 꿈에 확신 있는 사람이 항상 부러웠다. 어린 나이에도 확실한 꿈이 있는 친구들이 있었다. 심지어 그 꿈에 이미 가까워져 가는 친구들도 있었다. 외교관의 꿈을 가지고 외고에 진학하거나, 미술에 뜻을 갖고 예고에 진학하거나, 혹은 벌써 체육선수 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도 있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니 꿈 없는 친구 찾기가 더 어려웠다. 성적 맞춰 아무 학과 가던 건 옛날 얘기. 우리 때는 이미 빠른 진로 탐색과 설계가 권장되고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생활기록부를 진로에 맞게 통일시켜야 학생부 종합 전형에서 합격할 수 있다고들 했다. 꿈에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친구들이 하나둘 늘었다.
그 친구들은 하나같이 반짝반짝해 보였다. 꿈이야 언제든 바뀔 수 있다지만 그래도 어쨌든 미래에 멋진 무언가가 되어있을 것만 같았다. 미래를 생각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나와 달리... 그 친구들이 진로와 관련해 힘겨워하는 모습마저도 나는 부러웠다.
-그런데, 나는 정말 아무것도 꿈꾸지 않았던 걸까? 내가 그리는 미래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을까?
사실 나는 글 쓰는 걸 남몰래 좋아했다. 글 쓰는 직업이 뭐가 있는지도 모르던 시기, 글을 쓰는 직업 중에 아는 건 작가 하나였다. 하지만 한 번도 나는 내 입으로 ‘나는 작가가 꿈이다’라고 말한 적 없었다.
아마도 그때 내 생각에, 그리고 내 자존심에 작가가 꿈이라고 말하면 반드시 글을 출중하게 잘 써야 할 것 같았고,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고, 그러니 글을 잘 쓰지도 못하면서 작가라는 꿈을 가지고 있으면 누군가 비웃을 것만 같았다.
너 작가해도 되겠다라는 말을 들을 때에는 ‘너 아이돌 해도 되겠다’라는 말을 들은 것처럼 농담으로 넘겼다. 작가 같은 거 할 생각 추호도 없다는 듯이, 글 쓰는 거에 전혀 진심 아니라는 듯이.
그래서 나는 줄곧 꿈이 없는 척했다. 이건 그저 남들에게 부끄럽기 싫은 마음만은 아니었다.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로 부끄럽기 싫었다. 내가 작가라는 꿈을 인정하는 순간 재능은 없는데 욕심만 큰 사람의 비참함을 떠안아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꿈을 거부했다. 그러니까 남들에겐 꿈을 숨기고 뒤에서는 비밀스러운 꿈을 키우는 깜찍한 아이도 아니었던 거다. 그냥 나는 꿈 없는 학창 시절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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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스스로 꿈을 거부하고 있었다는 걸 자각한 건 일면식도 없는 옆 반 아이 때문이었다. 친구의 친구라서 들려온 가벼운 소식이었다. 그 친구는 문예창작과 입시를 준비하는데 수상 시 입시에 가산점이 되는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결석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데 심장이 크게 뛰었다. 좋은 느낌의 두근거림은 아니었다. 내가 뭔가를 많이 지나쳐왔다는 불안감. 자기 꿈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그 아이에 대한 질투.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나에 대한 원망. 뭐 그런 것들이었을 거다. 자연스레 그 아이와 나의 상황을 비교해보는 나 자신을 보면서 내가 그 아이와 비슷한 꿈을 꾸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리게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겨우 그런 알아차림이 터닝 포인트가 된 것은 아니었다. 꿈을 작가라고 말하지 않는 건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 친구처럼 문창과 입시를 준비하는 것도 아니었고, 특정 분야 글을 반드시 쓰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어떤 글을 꾸준히 쓰고 있는 상태는 더더욱 아니었다. 작가라면 어떤 작가인지 앞에 딸린 이름이 있어야 할 텐데 그 이름을 정하기도 어려웠다.
가장 곤란했던 건 고3 때 학생부 종합을 준비하면서 어떻게든 한 단어로 꿈을 정의해야 했을 때였다. 그때는 드라마 보기를 좋아했으니 드라마 작가라고 적어냈다. 드라마 작가라고 정한 꿈은 대학도 들어가기 전 자기소개서를 쓰는 와중에 사라져버렸다.
어찌저찌 글과 관련된 학과에 들어와 다니면서도 끝내 내 꿈은 작가라고 정의 내리지는 못했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자신의 진로를 또다시 잃어버린 수많은 친구들 틈바구니에 섞여 나도 또다시 헤매는 대학 생활을 보냈다. 꿈에 대해서 묻는 말엔 여전히 대답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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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교양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갑자기 삶의 목적이 무엇이냐는 무거운 질문을 가볍게 던졌다. 당연히 대답하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그 정적을 이기고자 교수님은 출석부를 살폈다. 그리고 우연히 내가 걸렸다.
하녕이는 왜 이 학과에 왔지?
글쓰는 게 좋아서요.
지금도?
네.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
아마도요.
단순하고 짧은 문답이었다. 교수님은 이 질문으로 나의 삶의 목적을 묻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교수님은 아실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때 나의 꿈 비슷한 걸 말했다고 느꼈다. 내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꿈을 말하다니.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몰랐겠지만 그 순간은 어쩌면 내가 꿈을 입 밖으로 말한 첫 순간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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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봐도 꿈이라는 건 명사의 형태는 아닌 것 같다. 누가 내게 꿈이 뭐냐고 한 단어로 말하라고 하면 입을 열 수 없다. 간단히 정의할 수 있는 꿈만 꿈이라면 난 아직도 꿈 없는 사람이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래를 그리지 않는 사람은 아니다.
나는 이제 글 쓰는 걸 좋아한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꿈이 작가가 아니라도 글을 쓸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내가 에세이 작가가 아니어도 내 글을 계속 읽어주는 이들을 위해 글을 계속 쓰고 싶다. 그리고 함께 글을 쓰는 누군가와 계속 함께 글 쓰고 싶다.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좋다.
또 내가 하고 싶은 건 저녁에 물가를 걷는 것. 한강이 아니라 동네 작은 실개천이어도 좋고 조금 멀리 떨어진 호수여도 좋다. 또 되고 싶은 건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 사람, 그러면서도 주변 사람을 외롭게 하지 않는 사람.
시간 여유는 없어도 마음만은 여유 넘치는 사람, 힘든 하루에도 자기 전에는 뽀송하게 씻고 부드러운 잠옷을 입고 무드등 켜두고 공들여 자는... 이런 모습들을 나는 꿈꾼다.
누구에게나 한 단어, 혹은 한 문장으로는 채 설명할 수 없는 꿈이 마음속에 분명히 있을 지도 모른다. 현존하는 직업으로 정리되는 꿈이나 거창한 꿈이 아니어도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 꿈이 뭐냐는 질문은 하지 말자. 겨우 그게 꿈이냐는 반문도 말자. 특히 나 자신에게 그렇게 묻지 말자.
대신 어떻게 살고 싶냐는 질문을 던져보자. 어쩌면 그 대답에서 진짜 꿈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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