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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연초는 이랬다.

 친구네 집에서 숙취로 어기적어기적 일어나,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당근거래를 하러 가는 길에 한 아주머니가 나를 불렀다.

 택시에 휴대전화를 놓고 왔는데 전화 한 번만 빌려주세요-.

 흔쾌히 내어드렸더니 얼마 후 기프티콘과 함께 감사와 축복이 가득 담긴 연락이 왔다. 별 거 아닌 일이었는데, 감동이다. 새해라 그런가?

 뭔가, 올해는 엉망이어도 결말은 꽤 괜찮을 거 같지…

🎄 

 벌써 12월이다. 날씨가 춥다. 롱패딩은 아니고 가끔 숏 패딩을 꺼낼 정도. 밤거리를 나서면 찬 공기에 두 뺨이 살짝 언다. 손바닥을 가져다 대, 맨들맨들한 감촉을 느낀다. 겨울은 오감을 자극한다. 가을보다 좀 더 세상이 반짝인다.

 다들 크리스마스 준비가 한창인가 보다. 간간이 들려오는 노랫소리, 케이팝에서 북유럽으로 넘어온 느낌. 성스러운 캐롤들이 들린다.

 길거리 음식 냄새가 하나 둘 후각을 자극하기 시작한다. 붕어빵, 군고구마, 타코야끼, 계란빵. 모두 매력적이지만 그중에서도 델리만쥬가 제일이다. 멀리서부터 새어 나오는 달짝지근하고 고소한 향.

 친구들에게 하나 사갈까- 물으면, 친구들은 델리만쥬는 '맛보다 향이 더 맛있어-' 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던 길을 가지만, 혼자 있을 때는 유혹에 홀라당 넘어간다. 어느새 볼 가득 델리만쥬를 먹으며 '생각보다 맛도 알찬데-' 생각한다.

 🐥 

 스무 살, 나의 성장은 대부분 하반기에 진행되었다. 역시 시련이 있어야 성장도 오는 걸까. 그때는 많이 아팠는데, 돌아보니 성장통이었음을 느낀다.

 올해의 상반기에는 너무나 새로운 것들뿐이라 정신없이 놀기 바빴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 그리고 볼거리, 먹을거리로 가득한 서울.

 조금 익숙해지고 나자, 외로움과 공허함이 몰려왔다. 너무 화려한 환경이라, 밍밍하게 살아온 나의 공허는 더 부각되었다.

 상반기를 사람들과 함께했다면, 하반기는 나 자신만의 시간도 필요했다. 하지만 환경상 그러기 힘들었고, 그래서 그렇게 지쳤나 보다. 나는 스무 살의 늦은 유아 퇴행을 하였다.

 유아 퇴행은 사실 아동에게서 많이 관찰되는 현상이다. 아이들에게는 매일 마주하는 모든 것이 처음 해보는 것이고 새롭다. 그래서 변화된 환경에서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게 되면 퇴행하는 모습을 보인다. 자신이 잘하던 것으로 돌아가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나만의 퇴행이 있었는데, 계속해서 고향을 찾았다. 내가 익숙하고 잘하던 것이 많은 곳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9월에는 거의 2주에 한 번씩 본가에 내려갔다. 도피성으로 본가를 자주 찾았고 오랜 친구들을 찾았다. 서울에 있어도 자주 전화했고, 습관이 되었다. 이전에는 전화 자체를 싫어하던 내가 너무나 바뀌어버렸다.

 그러한 나의 모습을 보면 나를 이렇게 단번에 변화시킨 시련이 자꾸만 상기됐다. 또 나는 고등학생 시절을 그리워했고, 변해가는 친구들의 모습에 씁쓸했고, 계속 과거를 찾았다. 그때는 어떠한 고난도 없었던 것 마냥, 과거는 내게 행복만 하고 그리운 도피처로 미화되었다.

 그래서 나의 하반기는 스무 살의 유아 퇴행을 극복하는 시기였다. 생각도 고민도 심각하게 많은 나를 가만히 둘 수 없었다.

 책을 읽다 글에 관심이 갔고, 나의 생각거리들을 글로 쓰니 안정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글쓰기 소모임에서 다룬 나의 글들은 모두 나와 내 생각에 집중되어 있다.

 인간관계의 고민을 해결하고자 많은 주변인의 조언을 받았고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고향뿐만 아니라 서울에서도 같이 있으면 재밌고 편안한 소중한 관계들이 생겼다.

 혼자 무언가를 도전하고 여행하는 일이 늘었다. 회피적인 성향을 고치고자, 일이 생기면 원인을 직시하고 맞서기 위해 애썼다.

 지금은 마음가짐이 많이 달라졌다. 하루하루를 즐기고 있고 궁상맞게 있지 않는다. 본가로 도망가지 않는 것도 벌써 한 달째이다! 여전히 집은 그립지만 그래도 조금의 변화가 생겼다는 것에 나 자신이 대견하다.

❄️

 겨울이 좋다. 봄, 여름, 가을 동안 얼룩덜룩해져 어지러워진 만물이 깨끗한 흰빛으로 덮인다. 하얀 도화지로 돌아오게 되면, 이전에 그렸던 것들에게 미련을 주지 않고 다시 새로운 해를 그려낸다.

 어떤 변덕인지, 더운 여름엔 그렇게 사람들과 떨어져 있고 싶었는데 겨울엔 사람들과 붙어 있고, 정을 나누고 싶어진다. 모두들 흩어져 자신만의 한 해를 열심히 보내다가, 연말엔 다시 소중한 사람들 곁으로 모인다. 불안정한 시작에 비해 꽤 안정된 마무리는 행복으로만 가득하다.

 내가 썼던 글들을 다시 본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 아니었다면 난 진작에 멸종했다!』, 『모든 소중한 인연에게』, 『반려자 A』, 『꿈 일대기』, 그리고 이번 글 『It’s Good, and Bye!』.

 이전에 썼던 글에서 묻어나는 걱정들은 지금은 거의 고민하지 않는, 해결된 부분들이다. 그렇게 나는 글에다 내 마지막 미련을 묻히고,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몰랐는데 그렇더라. 나름의 나를 지키는 방법이었던가. 글에서 드러나는 내가 초반에는 불안하다가도 뒤로 갈수록 안정된 것 같다는 느낌도 받았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 안정될 것이라는 착각은 금물이다. 내년에는 내년의 고민이 있겠지. 또 새로운 시련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때는 과거의 내게로 돌아오려 하지 말고, 과거에도 과거의 고민과 해결하기 위한 고군분투가 있었구나-,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