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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12월 25일을 기점으로 겨울을 나눈다. 12월 1일부터 12월 25일까지는 포근하고 따뜻한 겨울.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세상의 들뜬 분위기에 나도 함께 설렌다.

 그맘때쯤 첫눈이 내리고, 캐롤을 듣고 흥얼거리고, 폭신폭신한 겨울옷, 함박눈이 예쁘게 쌓인 거리, 핫초코 미떼....

 하지만 이런 겨울은 12월 25일이 지나가자마자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그 이후의 겨울은 거무죽죽한 롱패딩, 앙상한 나뭇가지, 낙엽이 썩어가고 눈이 녹아 지저분한 거리, 몸을 움츠리고 빠르게 걷는 모두들….

 

 크리스마스가 끝나버린 연말은 쓸쓸하다. 한파에도 열심히 돌아다니며 트리를 구경하고 겨울용 플레이리스트에 담을 노래를 탐색하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아무것도 시작하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특별하게 대하고 싶지 않고,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다. 수능 끝난 후 낯선 학교 운동장을 혼자 걸어 나오던 때의 기분이다.

 사실 나는 크리스마스 당일을 그다지 특별하게 보내지도 않는다. 가족과 케이크를 먹을 때도 안 먹을 때도 있고, 누군가를 만나 사람 많은 곳을 놀러 갈 때도 안 갈 때도 있고. 언제는 온종일 아르바이트만 한 적도 있다.

 그런데도 내가 크리스마스 끝난 후에 이렇게나 허전해하는 이유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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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보다 어릴 때는 확실히 이벤트가 많았다. 추석, 설, 제삿날엔 할머니 댁에 가서 제사음식이나 떡국을 배터지게 먹고 성묘를 하러 몇 시간이나 차를 타고 갔다. 마치 여행처럼 느껴졌다. 발렌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빼빼로데이 외 자질구레한 ‘데이’들도 열심히 챙겼다.

 어린이날도 일 년 중 가장 큰 이벤트 중 하나였다. 엄마는 동지엔 새알 팥죽을 정월 대보름엔 오곡밥을 만들었다.

 지금은 시험 기간에 밀려 아무 감흥 없이 지나가는 생일마저도 어릴 땐 얼마나 특별했던가. 그때는 생일날만큼은 종일 행복해야 한다고 믿었다.

 어른이 되면 그런 특별한 것들에 무감해지는 것이 순리인지, 손꼽아 기다리던 특별한 날들이 하나둘 자취를 감추었다. 겨우 남은 이벤트가 크리스마스. 일 년에 기다릴 날이 크리스마스밖에 남지 않자 그날의 존재감이 너무 커졌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12월 24일까지는 평소보다 설레지만, 크리스마스가 사라져버린 12월 말은 다른 달보다도 유독 텅 빈 것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나는 크리스마스가 끝난 것이 아쉬운 것이 아니라,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던 날들이 끝난 것을 아쉬워하는 것이다. 무언가 기대하는 것이 있는 시간과 없는 시간의 차이가 크다. 그 차이가 내 겨울을 포근하게 만들기도 을씨년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기대할수록 허전함도 커진다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허전하지 않기 위해 기대조차 하지 말자는 다짐은 내겐 조금 어렵다. 차라리 기대할만한 무언가를 계속해서 만들어 허전함의 텀을 줄이고 싶다.

 

 종강한 날 실컷 놀거나 쉴 계획을 세워두는 것, 내일의 날씨에 잘 어울리는 메뉴를 미리 정해두는 것, 오랜만에 보는 친구와의 약속에 입을 옷을 전날 고르는 것.

 -이런 사소한 것이라도 충분히 설렌다. 매달 첫째 주 일요일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날로 정해두는 것도 좋다.

 혹은 별거 아닌 일이라도 내게 특별한 어떤 날을 나만의 기념일로 삼는 것도 좋다. (나라면 6월 26일을 안착한여성들의 창립일로 제정해 매년 기념하겠다!)

 

 기분 좋은 일을 계획하는 것, 그리고 그 일을 기대하고 설레하는 것. 생각해보면 그게 ‘희망’을 풀어 말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나 싶다.

 인간이 희망을 먹고 사는 존재라면 계획이란 안전하고 확실한 희망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계획적인 사람은 더 두근거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무언가 기다리는 자는 행복하다. <어린 왕자>에도 유명한 구절이 있지 않은가.

 “만약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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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언니와 연어를 먹자고 약속한 날이 있었다, 당일이 되어 내가 갑자기 다른 걸 먹자고 하니 언니는 펄펄 뛰며 반대했다.

 이미 연어를 먹으려고 온몸의 신경을 연어에 맞추어뒀기 때문에 다른 어떤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맛있지 않을 거라는 것이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하면서도, 연어를 향해 있는 언니의 신경을 상상했다. 언니는 바쁜 일상을 살면서도 나랑 먹을 연어를 온몸으로 기다렸을 것이다. 그건 언니가 지치고 힘든 일상을 버티는 방법이었다. 연어를 먹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일 년 중 가장 재미없는 날로 자리매김해온 크리스마스 다음 날. 올해는 그날 무엇을 하며 보낼지 계획해보기로 한다.

 기대할만한 계획, 하지만 확실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소소한 계획이어야 할 것이다. 올해 12월 26일 아침엔, 설렘에 눈이 번쩍 떠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