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기록을 확인하며 과거를 되새김하는 걸 넘어서, 재작년부터 음악을 비롯해 한 해 동안 본 책, 영화, 공연을 연말에 전부 정리하고 있다. 원래는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접한 뒤 그게 굉장히 인상이 깊었을 때면 그 감정이 너무 생생해서 시간이 지나도 여전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때 느낀 기분은 시간이 지날수록 흐릿해져 가고, 제목과 내용은 가물가물해지고, 심지어 본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늘어난다는 걸 어느 순간 깨달았다. 그때 내가 접한 것들을 정리해보는 시간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흐려지는 기억과 감정이 두려웠고 망각에 맞서고 싶었다.

  이런 나의 연말 정산(처음엔 소비 결산이라는 이름이었던) 우선 책부터 시작한다. 올해 책장을 채운 책들을 적고, 도서관의 대출 목록을 살펴보며 읽다 만 책들까지 전부 적는다. 제일 좋았던 작품을 뽑고 이유를 덧붙인다. 다음은 영화. 역시 베스트 영화를 선정하고 간단한 이유도 쓴다. 그리고 한 해 동안 들은 음악, 본 공연과 갔던 전시들을 떠올려 적는다. 작년엔 음식과 원두 부문도 추가했다. 특별히 좋았던 식당이나 음식을 기록하고, 나중에 잊지 말고 재구매하기 위해 마음에 들었던 로스터리 샵의 원두를 써 본다.

  연말 정산을 하다 보면, 그해에 좋아한 것들 이면에 감추어진 나의 모습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작년을 한 단어로 정리하자면 ‘혼란스러움’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작년의 기록을 들춰보면 『단단한 삶: 나답게, 자립하고 성장하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를 가장 인상 깊은 책으로 뽑아놓았다. 도서관을 거닐다가 우연히 발견 후 대출해온 책이었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작년 초엔 미국 밴드인 Twenty One Pilots에 빠졌다. 밤새 그들의 뮤비를 보고 노래를 들으며 노트북 앞에서 입을 틀어막았고, 인터뷰도 전부 보았다. 그들은 나와 달리 용기 있게 꿈을 좇은 사람들이었고, 무언가를 음악으로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것 같았다. 아직도 Car Radio라는 노래를 처음 들을 때의 순간이 잊히지 않는다. 내 이야기인 것 같아서.

  공연은 명확하게 제일 좋았던 하나의 작품을 뽑진 않았지만, 연극 <리더스>를 적어놓았다. 예매 기간을 놓쳐 슬퍼하며 취소 표는 언제쯤 풀리는지 문의했다가 취소된 좌석이 있으니 보러오겠냐는 극단의 연락을 받은 후 한달음에 달려갔던 공연이었다. 기대만큼 좋진 않았지만, 꽤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공연장에 들어가면 먼저 배우들에게 가져온 책을 건넨다. 공연 전 그들은 관객들이 인덱스를 붙여놓은 페이지 위주로 책들을 검토하고, 연극이 시작하면 그중 일부를 낭독하며 공연을 시작한다.

 공연 시작 시간이 되고 불이 꺼지면 작은 램프를 손에 든 배우가 책을 가져온 관객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책을 낭독한다. 그날 공연에서 읽힌 첫 책은 내가 가져온 황정은의 『계속해보겠습니다』였다.

 내가 표시한 곳보다 한 페이지 앞선 곳의 문단을 배우가 읽기 시작했다. “인간은 공룡이 아니므로 공룡보다는 빠르게 끝나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졌다.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나나는 생각합니다.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으니까. 즐거워하거나 슬퍼하거나 하며 버텨가고 있으니까. 한편 생각합니다. 무의미하다는 것은 나쁜 걸까…”

 그 배우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까지 내 앞에서 또박또박 읽었다. 정말 사랑했던 책의 문장을, 혼란스러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었던 위로의 글자들을, 그때 그 안의 모든 관객이 숨죽이고 들었다. 목소리엔 힘이 있구나, 그리고 그게 바로 이 연극의 메시지구나, 그렇게 온몸으로 느꼈다.

 
  지금은 애인이 된 사람과 아직 먼 사이일 때 공원을 거닐다가 벤치에 앉았었다. 어색한 침묵 속 그가 내게 물었다. 최근에 가장 소중했던 기억이 무엇이냐고. 나는 문득 떠오른 연극 <리더스>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의 앞에 무릎 꿇는 시늉까지 하며 배우를 흉내 내기도 했다. 그는 나중에 내게 말했다. 상대와 가까워지는 걸 도와주는 질문들의 목록에서 그 질문을 골랐다고.

 나는 궁금해져서 다른 질문들엔 무엇이 있는지 확인했었다. 질문들은 상대를 구성하는 게 무엇인지 파악하려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의 대답에서 미루어 볼 때 나를 구성하는 것들은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일 것이다. 나의 삶을 채우는 특별한 울림을 준 것들, 죽기 전 눈을 감을 때 떠오를 그런 기억들. 그것들을 두 팔 가득 안고 가고 싶은 욕심이 재작년부터 꿈틀거렸다. 그래서 연말이면 나는 내가 본 것들을 적는다. 한 해의 나를 기록한다.

 작년엔 혼란스러웠기에 그 혼란을 다독여주는 것들을 좋아했다면 올해는 조금 다르다. 올해엔 나 자신을 인정하고자 노력했던 한해였다. 다른 사람의 개별성을 인정하듯 내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모습 역시 스스로 좋아하길 바랐다. 그래서 자신의 개성을 열정적으로 표현하는 다소 기괴해 보이는 영국 가수 ‘영블러드’, 이탈리아 락밴드 ‘모네스킨’을 올해의 가수에 적을 것 같다. 정상성을 유쾌하게 다루는 이유리의 「치즈 달과 비스코티」와, 타인을 향한 온전한 이해의 불가능성에 대해 말하는 듯한 단편 소설 윤이형의 「루카」는 올해의 소설에 적힐 것이다.

  공연 <네이처 오브 포겟팅>을 인상 깊게 본 해이기도 했다. 치매를 앓는 한 주인공이 행복했던 과거를 계속 되새김질하는 공연이다. 슬프게도 그 기억은 점차 흐려진다. 나중에 내가 치매에 걸린다면 과연 어떤 강렬한 기억만이 끝끝내 남아있을까. 그 공연을 보며 그런 질문을 던졌다.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현재에 집중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바람을 되새기면서. 내년엔 이와 달리 회의적이고 희망 없는 것들을 좋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올해엔 이런 것들이 좋았다. 두려운 미래를 감싸 안고 현재로 눈을 돌리고 싶었던 한 해이니 말이다.

  올해의 연말 정산엔 새롭게 올해의 술집도 추가해보지 않을까 싶다. 서울이라는 도시로 오게 된 해였기에 이전에 살던 도시엔 많지 않았던 다양한 술집들에 가보았다. 각종 칵테일 바에서 여러 종류의 칵테일 마셔보며 어떤 걸 좋아하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고, 고양이가 어슬렁거리는 신촌의 ‘피망과 토마토’에 몇 번 방문해 뭉치라는 고양이와 친해졌다고 착각하기도 했다.

 밤 열두 시가 가까워져야 비로소 사람들로 가득해지는 홍대의 한 바에선 술에 많이 취한 채 행복해하고 있었는데 에드 시런의 Shape of You가 그렇게 신나는 노래인지 그 밤에 처음 알았다. 혼술하며 조용히 책을 읽거나 작업을 하고 싶을 때면 홍대의 ‘책읽다’에 갔다. 사장님도 소곤소곤 말하는 그곳에선 간단히 한 두잔 하며, 어쩐지 위로가 되는 침묵 속에 할 일을 할 수 있어 슬픈 여름이면 종종 들렀다.

  이런 기억들, 특별히 강렬하지 않아도 한 해의 조각이 되는 것만 같은 기억들을 전부 연말에 적고 싶고 적는다. 무언가를 겪은 경험은 옷처럼 벗어버리면 그만인 게 아니라 몸 안에 차곡차곡 스며드는 듯 하다. 그러므로 나에게 물든 것들을 적어보는 연말 정산은 일종의 일기이자 살아온 흔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흔적을 매년 모으다 보면 나의 삶과 살아가며 느꼈던 감정들을 단편적으로나마 보여주는 기록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므로 계속 쓰려고 한다. 나중에 나이가 더 들면 이것들이 제각각 반짝이는 보석이 되길 바라며, 누군가 찾아오면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 마냥 먼지를 털어내고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그땐 그랬지-가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아마 나는 이야기보따리를 힘겹게 품고 다니는 할머니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할머니를 꿈꾸는 나는, 연말이 되면 어쩐지 자꾸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어진다.

  일 년에 딱 한 번만, 연말이 오면 일기를 써보세요. 당신을 움직이게 한 것들을 기록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