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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해빈의 길티와 플레져가 만났다.

  “안녕, 나는 길티야.”

  “안녕? 나는 플레져야.”

 그들은 서로를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잘 알고 있다.

 플레져가 먼저 말을 건넨다.

  “너는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매번 가로막는 애, 맞지?”

 플레져의 말은 전혀 악의가 없지만 길티는 움찔한다.

  “그런 너는 매번 용납될 수 없는 일을 벌이려 하는 애고.”

 둘 사이에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맴돈다. 플레져는 히- 하고 바보 같은 웃음을 짓는다.

  “용납될 수 없다니? 어제만 해도 그래. 시험이 끝난 자축의 의미로 매운 닭발을 시켜 먹은 게 어때서 그렇게 죄책감을 가지니?”

  “배달 음식 끊기로 다짐한 게 몇 시간도 안 지났잖아. 그리고 1인분도 아니고 주먹밥이랑 계란찜까지 아주 세트로 포식했더라? 수술 끝나고 건강 신경 쓰기로 한 거 잊었어?”

  “건강은 무슨. 본심은 집에 가족들이 와서 혼을 낼까 봐 그런 거면서 건강 핑계 대기는. 그렇게 남의 시선이 신경 쓰이니? 맛있는 거 하나 먹는데?”

 길티가 다시 한 번 움찔한다.

  “나는 단지 해빈을 위했을 뿐이야.”

  “진짜 해빈을 위한 게 뭔지 생각해 봐.”

 망상해버렸다. 나의 죄책감과 쾌락이 만나 대화를 나누는 망상. 어제 먹은 닭발이 그렇게 신경 쓰였나? 미친 맛이었지... 또 먹고 싶다. 근데 정신없이 먹고 난 후 기분 나쁜 배부름이 느껴졌다. 배가 너무 빵빵했다. 소화가 안 돼서 더부룩한 상태가 몇 시간이고 계속됐다. 후회가 찾아왔다. 역시 먹지 말 걸, 폭식으로 스트레스 풀지 않기로 다짐했는데, 너무 매운 건 몸에 안 좋은데. 왜 항상 쾌락 끝엔 죄책감이 오는 걸까. 마음 상태가 점수판이라면 +1을 얻는 즉시 -1이 와서 0으로 돌아간다. 그렇게까지 밸런스를 맞춰야만 속이 시원하냐, 인간 본성아?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는 자연의 섭리가 오늘 따라 원망스럽다.

 길티와 플레져라. 또 둘이 무얼 갖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으려나? 하품하며 핸드폰을 집어든다. 유튜브에 들어가 실시간 인기 동영상을 클릭한다. <영국남자> 채널 영상이 2위다. 잘생긴 영국 고등학생 애들이 한국에 온다고? 이걸 봐야 해, 말아야 해. 영상을 누르기 망설이는 손가락이 액정 위에서 빙글빙글 돈다. 아, 길티와 플레져가 2차전을 벌이고 있나 보다.

  “절대 클릭하지 마.”

  “왜? 귀엽잖아. 영국 남자애들 중에 앤 해서웨이 닮은 잘생긴 애도 있다고. 학생회장이었나.”

  “안 돼. 영상 본지는 오래됐는데 일부러 구독도 안 눌렀잖아. 그 이유가 뭔지 너도 알지?”

  “국뽕채널이라서... 그래서 내가 ‘잘생긴 애 보기 위해서’라고 말했잖아. 단지 그 이유뿐이라면 괜찮지 않아?”

  “핑계다, 핑계! 그놈의 코리안 치킨, 그놈의 코리안 비프! 파이어 누들 챌린지 좀 그만하라 해... 백인 남성이 우리나라 문화를 극찬하는 영상을 소비하는 건 사대주의의 재흡수 그 이상 이하도 아니란 걸 너도 알잖아. 댓글 좀 봐. ‘우리나라를 좋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휴, 가관이다.”

  “그래, 네 말이 다 옳다. 너한텐 옳고 그름보다 더 중요한 건 없지? 근데 있잖아, 좋아함에 옳고 그름은 애초에 성립할 수 없어. 좋아함엔 이유가 없으니까! 너처럼 그렇게 따지고 계산하면 앞으로 해빈은 좋아하는 게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야.”

 에잇. 눈 딱 감고 클릭했다. 이번이 마지막 영상이야. 실시간 2위나 찍은 영상이면 나 말고도 엄청 많은 사람이 봤다는 거니까 그나마 위안이 된다. 나 혼자만 사대주의자가 아니니까. 역시 잘생겼군 미스터 해서웨이. 파마머리 친구도 아주 귀여워. 다음 영상에선 영국 친구들이 한국에 와서 소고기 먹고 워터파크 간단다. 아, 나 이거 올라오면 또 볼 것 같은데. 나 자신이 원망스럽다.

 <영국남자> 채널의 다른 영상들까지 볼까 두려워 서둘러 유튜브에서 빠져나왔다. 드라마나 봐야지. 왓챠로 들어간다. 최근 시청한 목록이 펼쳐진다. 다시 수치심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몽땅 유치하기 짝이 없는 ‘신데렐라 스토리’들이다. 클리셰 이야기. 평민 여주와 재벌 남주가 사랑에 빠지는 그런 내용. 개연성이 없을수록, 오글거릴수록, 키스의 횟수가 많을수록 좋다. 마침내 내 안의 길티와 플레져의 말다툼이 극에 달한다. - 왜 그딴 걸 보고 있냐고, 쪽팔리게! - 나도 인정하기 싫지만 재밌는 걸 어떡하냐고!

 가장 최근에 본 건 <사랑은 계속될 거야 어디까지나>라는 일본 드라마다. 포스터며 연기며 남녀 나이차까지 빈틈없이 끔찍하다. 정말 이렇게 순도 100% 완벽하게 닭살 돋는 작품이 있을 수가! 보는 동안 10초마다 멈춤을 누르면서도 결코 하차는 안 한 내 자신, 다 본 후에도 정주행을 3번이나 한 내 자신이 정말 수치스럽다. 당시 월경 기간이었다는 걸 최후의 변명거리로 삼아보지만 소용없다. 이 드라마에 대한 베스트 리뷰 글이 내 마음을 대변해준다. “난 죽을 때까지 이런 거 좋아한다...” 오, 당신도 나와 같은 마음이군요...

 언제부터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지. 완벽하게 고상한 취향을 가질 순 없을까. 아니면 그냥 이런 거 좋아하는 게 가장 인간적인 건가. 10대 시절 유행했던 드라마 <드림하이2>에 나온 노래 가사가 떠오른다. 우리는 B.. B.. B급 인생.. A급이 되고 싶은... 아악 이 노래마저 길티 플레져잖아! 나는 망했다. 우아하고 고상하게 살긴 글러 먹었다. 그래요, 나 사실 ‘그런 거’ 좋아합니다. 나는 폭식쟁이고 국뽕에 취해있고 클리셰 좋아하는 오타쿠입니다. 근데 사실, 당신도 그렇잖아요? 말은 안 하지만 그렇다는 거 다 압니다. 밤 9시에 밖을 내다보면 배달 오토바이가 열심히 달리고 있는 것만 봐도, 국뽕 채널 영상의 조회수만 봐도, 고전 베스트셀러가 <오만과 편견>이라는 점만 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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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친구 에이미. 그는 나의 ‘길티 플레져’를 ‘길티’로부터 구해준 은인이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그날. 에이미는 자신의 이야기를 했을 뿐이었겠지만, 덕분에 나는 많이 달라졌다. 즐거운 일을 떳떳하게 하는 에이미. 뻔뻔하리만치 당당해서 결국 부모님이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에이미. 그날 우리는 에이미네 아파트 벤치에 앉아, 바로 자위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다.

 자위는 나의 가장 큰 ‘길티 플레져’였다. 처음에는 그저 ‘플레져’였다. 기억이 시작되는 때부터 자위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아마 5살 정도였던 것 같다. 나의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르던 시절이었다. 아무 편견 없이 즐기던 놀이였다. 누워서 다리를 꼬면, 가랑이에 가해지는 압박감에 기묘하게 흥분되었다. 두 다리와 손가락으로 압박을 풀었다 주었다 하면 어느새 후끈 달아올라 일순간 후련해지는 감각이 몹시 좋았다.

 그러나 그런 시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이 기분 좋은 행위가 ‘해서는 안 되는 것’, ‘남들에게 보이지 않아야 하는 것’이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주요한 계기는 엄마의 시선이었다. 엄마는 처음에는 신경 쓰지 않다가, 점점 내가 하는 행위가 무엇인지 깨달아갔다. 어느 날, 유치원에 다녀와 거실 한가운데에 누워서 자위를 하고 있는데, 엄마가 나를 일으켜 앉히더니 눈물 쏙 빠지게 혼냈다. 그런 행동 하지 말라고. 아주 안 좋은 거라고. 딸이 ‘발랑 까진’ 계집아이가 될까봐 무서우셨을까?

 하지만 이미 그 즐거움을 알았기에 혼자 있을 때면 여전히 가랑이가 근질근질했다. 결국 거실에서 대놓고 하던 걸 어느새 방구석에서 몰래 하고, 침대에서 하다가 누가 들어오면 자는 척을 했다. 엄마에게만 들키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해서, 종종 수업 시간에도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다리를 꼬고 가랑이 쪽을 손끝으로 꾹꾹 눌렀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이 “너희가 딴 짓하는 거 교탁에서 다 보인다!”라고 말하더니 학생들 한 명씩 교단 위에 올라가서 내려다보게 했다.

 충격이었다. 정말 다 보였다. 누가 다리를 꼼지락대는지, 책상 아래로 무얼 만지고 있는지. 지금까지 선생님이 내가 자위하는 것도 다 알았겠구나 싶었고, 나 때문에 일부러 이런 기회를 마련한 것 같다고 확신했다. 자리로 돌아가 두 귀가 빨개질 만큼 부끄러운 감정이 들었고, 자책했다. 모두가 알아주는 ‘선생님 바라기’였기 때문에 그간의 자위가 더욱 후회됐다. 그 뒤로는 완전히 길티 플레져가 되었다. 집에 혼자 있을 때 못 참고 가끔 하면서도, 누가 방문을 열고 들어올 까봐 전전긍긍했다. 간혹 엄마가 ‘현장’을 발각할 때, 내가 죄라도 저지른 듯 당황하고 분노한 표정을 볼 때마다 죄책감이 커져갔다.

 그런 내가 에이미를 알게 된 건 고등학생 때다. 다른 친구와 달리 에이미와는 종종 야한 농담을 했지만, 자위에 대한 얘기를 해본 적은 없었다. 특히 내가 자위를 입에 담기 어려워하기도 했다. 성인이 되고 어느 날, 에이미네 집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서 한 아파트 벤치에 앉았다. 주변이 아주 조용했고, 계속 이어지는 은은한 농담들에 분위기는 나른하고 편안했다. 뭐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에이미가 다 받아줄 거라는 믿음이 들었다.

 내가 물었다. 너는 자위하니?　나는 한 지 오래됐어…. 에이미의 대답을 기다리며 쿨한 척했지만 사실 가슴이 몹시 뛰었다. 긴장감에 목이 타 맥주를 자꾸만 홀짝였다. 그런데 에이미의 반응은, 딱 고삐 풀린 말 같았다. 에이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자위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너무 놀라웠다. 에이미는 매일 밤 자위를 하지 않으면 잠이 안 오고, 온갖 기구들을 쟁여놓았다는 것이다. 난 가끔 손으로나 하는데. 내 말에 그는 선지자 같은 장엄한 말투로, 손으로 하는 자극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빠른 시일 내에 전동 기구를 써보라는 등 자신의 ‘자위비법’을 설파했다.

 가장 놀라웠던 발언은, 에이미가 자위 기구들을 대놓고 침대 머리맡에 두고 쓴다는 것이었다. 내 눈에 엄격해보이시던 에이미의 부모님은 “어후! 정리 좀 해라!”하며, 자위 기구도 널브러진 필기구마냥 대하신다고 했다. 그만큼 에이미의 자위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는 게 신기했다. 우리 집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성(性)에 대한 얘기는 금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에이미는 떳떳하게 성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그날 해가 저물어가도록 벤치에 앉아, 서로 자위의 역사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얘기했다.

 그날의 대화 이후, 나는 자위에 관해 죄책감이 들 때마다 에이미를 떠올리게 되었다. 에이미라면 들킬까봐 쫄지 않았겠지. 에이미의 추천대로 전동 자위 기구들을 구입해 어디 숨길까 고민하다가도, 문득 에이미를 생각했다. 에이미는 굳이 숨기지 않을 텐데. 적어도 괜히 혼자 찔려서 끙끙대지는 않을 텐데. 우리 집 정서상 에이미네처럼 될 가능성은 요원했다. 그렇지만 만약 언젠가 들키더라도, 절대 죄책감은 가지지 말자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됐다.

 현재 나는 에이미의 충고를 받아 다양한 반려 기구들과 함께하고 있다. 여름밤의 무료함을 달래기에도 안성맞춤이고, 가끔은 샤워를 할 때도 좋다. 단지 성(性)적 필요에 의한 만남을 할 필요도 없다. 에이미가 없었다면 지금 이런 글을 쓰는 건 ‘길티’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터놓고 말하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는 않는다. 조금 쑥스럽기는 하지만! ‘안착한 여성들’의 채널이니 언젠가 꼭 한 번 써보고 싶었다. 자위가 주는 ‘플레져’에 제대로 안착(安着)한 지금이 행복하다. 또 소중하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의 무구한 플레져와는 다른 차원의, 마침내 ‘길티’를 극복해내고 얻은 진정한 ‘플레져’가!